
1조5000억달러, 우리 돈으로 2165조원을 운용하는 글로벌 자산 소유자 26곳이 최근 자산운용사들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기후변화 대응에 소홀하면 운용사를 교체하겠다"는 경고였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한발 더 나아가 기후 및 탈탄소화 스튜어드십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며 ESG 주주 행동주의를 본격화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에게 기후위기는 더 이상 환경 문제가 아닌 장기적 재정 위험이자 투자 성과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가 되었다.
노르웨이 국부펀드(GPFG)는 이미 기후변화 위험을 이유로 195개 기업을 투자 배제했고, 네덜란드 ABP와 APG는 2030년까지 IPCC 1.5도 시나리오에 부합하는 중간 감축 목표를 설정했다. 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CalPERS)은 1000억달러 규모의 기후 행동 계획을 발표했다. 이들은 기후 대응과 수익성이 상충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오히려 기후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장기 수익률을 높이는 길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가. 국민연금을 비롯한 국내 주요 기관투자자들은 여전히 기후 책임 투자를 '선택 사항'으로 여기고 있다. 무엇보다 해외와 달리 이들에게 기후 관련 투자 책임을 묻는 제도적 장치가 전무하다. 자율에 맡긴다는 명분 아래 글로벌 스탠더드와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물론 한국 기관투자자들의 현실적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국민의 노후 자금을 운용하는 국민연금으로서는 단기 수익률에 대한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기후 대응에 적극적으로 나서다가 수익률이 하락하면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이는 충분히 타당한 우려다.
하지만 기후위기가 가져올 금융 리스크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2035년 이후 석탄발전이 '좌초 자산'이 되면 한국전력만 9조7000억원의 손실이 예상된다. 포스코를 비롯한 고탄소 기업들의 전환 실패는 곧 투자자의 손실로 이어진다. 단기 수익에 집착하다가 장기적으로 더 큰 손실을 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수탁자 책임 위반이 아닐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미래세대에게 물려줄 세상이다.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이 살아갈 2070년, 2080년의 한반도는 어떤 모습일까. 기후변화로 인한 재해가 일상이 된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연금을 받는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현재세대의 노후만큼이나 미래세대의 생존권도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지속 가능 투자의 본질이다.
다행히 해법은 있다. 경제개혁연대가 최근 제안한 '세이온클라이밋(Say on Climate)'이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기업이 온실가스 배출 현황과 감축 계획을 공개하고, 주주총회에서 이에 대한 권고적 표결을 받는 제도다. 2020년 스페인에서 시작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프랑스는 상법 개정을 통한 제도화를 추진 중이다.
세이온클라이밋의 장점은 기업과 투자자 모두에게 유연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구속력은 없지만 기업은 주주의 기대를 명확히 알 수 있고, 투자자는 기업의 기후 전략에 대해 의견을 표명할 수 있다. 감축 계획이 공개되면 그린워싱도 어려워진다. 무엇보다 대화와 협력을 통해 전환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한국 실정에 적합하다.
나아가 이러한 세이온클라이밋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권고적 주주제안'의 전면적 도입이 필수적이다. 현행법상 ESG 관련 주주제안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법령과 정관이 정한 사항만 주주제안이 가능하다는 해석 때문이다. 세이온클라이밋을 포함해 기후 관련 이슈를 주주총회에서 논의하려면, 미국처럼 주주제안 범위에 원칙적 제한이 없으면서도 이사회 재량을 존중하는 권고적 주주제안 제도가 반드시 도입되어야 한다. 이는 국내외 기관투자자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기후 이슈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될 것이다.
최근 국민연금이 탈석탄 투자 제한 전략을 수립한 것은 고무적이다. 비록 해외 기준에 비하면 느슨하지만, 첫걸음을 뗐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제 다른 기관투자자들도 움직여야 한다.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주요 보험사와 자산운용사들이 함께 나서야 변화가 가능하다.
기관투자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TCFD 기준에 따른 기후 정보 공시를 시작해야 한다. 둘째, 고배출 기업과의 건설적인 대화를 통해 전환을 유도해야 한다. 셋째, 단계적이고 현실적인 화석연료 투자 축소 로드맵을 수립해야 한다. 넷째, 기후 리스크를 투자 의사결정에 통합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정부와 국회의 역할도 중요하다. 세이온클라이밋과 권고적 주주제안을 제도화하고, 기관투자자들이 기후 책임 투자를 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동시에 전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단기적 성과 저하에 대한 면책 조항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기후 책임 투자는 비용이 아닌 투자다. 단기 수익과 장기 지속가능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해외 연기금들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 이제 한국의 기관투자자들도 선언을 넘어 실천으로 나아갈 때다. 현재세대의 안정적 노후와 미래세대의 지속 가능한 삶,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지혜로운 해법을 찾아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윤태준 액트 기업지배구조연구소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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