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신상민 기자] 폭력 속에서 어린 시절을 빼앗긴 아이들, 전쟁터에서 조국과 자신의 정체성을 함께 지키려는 군인들, 늦은 나이에 잊었던 꿈을 다시 꺼내 든 사람들. 서로 다른 환경에 놓인 이들의 이야기가 스크린에서 관객을 만납니다. 모두 불합리한 현실에 맞서거나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 용기를 낸 사람들입니다.
오는 23일부터 25일까지 이화여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리는 제3회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는 18개국 46편의 작품들을 선보입니다. 이번 출품작들은 전쟁과 국가폭력, 사회적 차별을 고발하는 영화부터 언론의 역할을 되묻고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하는 영화까지 다채롭게 구성됐습니다. 뉴스토마토는 개·폐막작과 주요 특별 섹션을 중심으로 눈여겨볼 작품들을 살펴봤습니다.
폭력에 빼앗긴 일상…전쟁과 차별에 맞선 사람들
개막작 <레인보우스 테일>은 이란 살레 알라비자데 감독이 서로 다른 폭력을 겪은 일곱 아이의 이야기를 그린 옴니버스 극영화로, 어린 시절의 폭력과 상처가 성장한 뒤에도 남기는 흔적을 따라갑니다. 이란의 '여성, 삶, 자유' 운동 중 보안군에게 희생된 9세 소년을 추모하며 만들었으며, 아이들의 시선으로 국가폭력의 후유증을 돌아보게 합니다.
폐막작 <아우어 컬러스 네버 페이드>는 짐 맥셰리 감독이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 성소수자 군인과 시민들을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저격수와 의무병, 드론 제작자로 변해간 이들은 조국을 지키면서 동시에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한 싸움을 이어가며, 극한 상황에서 애국심과 소수자 인권의 공존을 보여줍니다.
영국 노아 미를라흐 감독의 단편 다큐멘터리 <더 디센던트 오브 케이블 스트리트>는 1930년대 파시즘에 맞서 싸운 아버지를 둔 유대인 남성이 런던의 친팔레스타인 시위에서 체포되는 이야기로, 세대를 건너는 저항의 의미를 조명합니다.
또 4분짜리 애니메이션 <딜리트>는 체제의 억압을 받는 아프가니스탄 여학생들의 현실을 통해 교육과 자유를 제한받는 여성들의 삶을 조명합니다. 한국 단편 <레드 태그>는 해병대 최전방 초소에서 익명 신고 후 내부고발자를 뜻하는 레드 태그로 낙인찍힌 일병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란 살레 알라비자데 감독 개막작 <레인보우스 테일> 포스터(왼쪽)와 짐 맥셰리 감독의 폐막작 <아우어 컬러스 네버 페이드> 포스터. (자료=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언론의 책임과 역사적 상처…기억해야 할 이야기들
올해 신설된 저널리즘 섹션에서는 다큐멘터리 두 편을 상영합니다. 태준식 감독의 <슬기로운 해법>은 한국 언론이 오보를 기정사실화하거나 자본과 결탁해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파헤치며, 언론 자체가 또 다른 권력이 됐을 때 누가 이를 감시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김종관 감독의 <졸업앨범: 선생님을 기다렸다>는 5·18 당시 민주화운동에 함께했던 부교장과 제자들이 42년 만에 다시 마주해 기억을 꺼내고 화해를 모색하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제3회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상영작 리스트 포스터. (자료=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 시작된 도전…인생 2막의 용기
'인생 2막' 섹션은 나이와 환경의 제약을 넘어 꿈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합니다. 미국 다큐멘터리 <체이싱 플라스틱>은 한국계 시니어들이 결성한 얼티밋 프리스비 팀이 월드 마스터스 챔피언십에서 첫 우승을 목표로 훈련하는 과정을 그리며, 노년의 삶이 은퇴와 휴식에만 머물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일본 극영화 <엔카, 길이 시작된다>는 건과자 가게를 운영하던 주부 요시코가 지역 노래 경연대회 우승 후 재능을 인정받아 부도칸 무대를 꿈꾸게 되지만, 오랜 가족의 일상과 새로 시작한 가수의 삶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야기입니다. 도전의 성패보다 꿈을 선택하는 과정의 두려움과 가족의 의미를 함께 다룹니다.
이 밖에 멕시코 다큐멘터리 <콘체르토 포 아더 핸즈>는 선천적 신체 제약이 있는 청년이 아버지가 작곡한 협주곡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연주하며 음악가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조명합니다.
영화제는 주요 감독들이 참석하는 관객과의 대화(GV)도 마련했습니다. 상영작들은 소재와 형식은 달라도 현실의 제약 앞에서 침묵하거나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영화제는 세상을 바꾸는 용기가 거대한 행동뿐 아니라 개인의 선택과 일상에서도 시작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제3회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추천작 리스트 포스터. (자료=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신상민 기자 lmez0810@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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