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 컴플렉스 외톨이서 시총 1위 AI제국 황제까지
자서전·인터뷰로 해부한 젠슨 황
괴롭힘 당하던 왕따 유학생 출신
93년, 아르바이트하던 곳서 창업
반복되는 위기 속에서 불굴 집념
"AI 분야 전쟁터의 유일한 무기상"
2025-06-09 17:02:09 2025-06-09 17:02:09
지난 4일, 인공지능(AI) 칩 시장을 선도하는 엔비디아가 4개월여 만에 시가총액 기준 세계 1위 자리에 복귀했습니다. 이날 뉴욕증시에서 엔비디아 시가총액은 3조4440억 달러로 불어나며, 이날 주가가 0.22% 오르는 데 그친 마이크로소프트(MS·3조4410억 달러)를 밀어내고 시총 순위 1위에 올랐습니다. 엔비디아를 지금의 세계 1위 AI 제국으로 만든 저력은 CEO 젠슨 황의 통찰과 집념이었습니다. 자서전과 인터뷰 등을 토대로 젠슨 황 신화를 해부했습니다._편집자
 
[뉴스토마토 안정훈 기자] “전기공학과 학생이 250명이었는데 여학생은 단 3명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로리가 가장 매력적이었다. 나는 외모로는 관심을 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숙제를 완벽히 끝내서 그녀를 감동시키려고 했다.”(스티븐 위트, <엔비디아 젠슨 황, 생각하는 기계>)
 
지난 3월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미국 새너제이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GTC 2025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오리건 주립대 신입생이던 로리 밀스는 안경 쓰고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에 친근하고 느긋한 성격이었습니다. 젠슨 황은 수업 첫 주에 무작위 배정된 실험 파트너인 19살 그녀에게 반했습니다. 그들은 공부 파트너에서 연인으로 발전했습니다. 젠슨 황은 그녀에게 “30살에 어엿한 회사의 CEO가 돼 호강시켜주겠다”고 청혼했습니다. 로리는 “당신이라면 진짜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며 프로포즈를 받아들였습니다.
 
젠슨은 1963년 대만 타이베이에서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화학 엔지니어였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습니다. 다섯 살되던 해 아버지가 태국 정유회사에 취직하며 가족은 방콕으로 이주했습니다. 젠슨이 미국 땅을 밟게 된 것은 1973년 태국에서 발생한 정치적 혼란 때문이었습니다. 그해 10월 군사독재 정권의 해체를 요구하는 시민 50만명이 거리로 몰려나왔고, 태국 정부는 탱크와 폭력을 동원해 이를 진압했습니다. 아버지는 우선 젠슨과 형 제프를 미국 워싱턴주 터코마에 있는 삼촌에게 보냈습니다.
 
아내 로리와 대학 졸업식에 참석한 젠슨 황. (사진=엔비디아)
 
삼촌은 부모와 떨어져 타국으로 건너온 열 살과 열두 살의 대만 아이들을 인구 300명 정도의 작은 시골마을에 있는 소년 교화학교(OBI)로 보냈습니다. 젠슨이 “모든 학생이 담배를 피웠고 나는 학교에서 주머니칼이 없는 유일한 학생이었다”고 말한 그곳에서, 그는 영어를 제대로 못해 괴롭힘을 당한 왕따였습니다. 학비를 벌기 위해 기숙사 화장실을 청소했지만, 젠슨은 그 시절을 “OBI에서 보낸 시간은 제 인생에서 있었던 최고의 일 중 하나”라고 회상했습니다. 젠슨 황은 2019년, 해당 학교가 기숙사와 교실을 짓도록 200만달러(약 26억원)를 기부한 바 있습니다.
 
“회사 폐업까지 단 30일 남았다”
 
전국 주니어 탁구선수였던 젠슨은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오리건 주립대에 입학했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탓이었습니다. 컴퓨터공학과가 없어 전기공학을 택했는데 그곳에서 지금의 아내 로리를 만났습니다. 스무살부터 AMD에서 일한 젠슨은 이후 LSI로직으로 이직했고 동료이자 미래의 공동창업자가 된 크리스 말라초스키와 커티스 프리엠과 조우합니다.
 
지난해 4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미국 실리콘밸리 엔비디아 본사에서 만난 모습. (사진=최태원 SK그룹 회장 페이스)
  
1993년 그는 자신이 한 때 아르바이트를 했던 실리콘밸리 식당체인 ‘데니스’에서 엔비디아를 설립했습니다. 질투라는 뜻의 라틴어 인비디아에서 회사명을 따왔지만, 엔비디아의 시작 역시 여느 빅테크 기업들처럼 초라했습니다. 젠슨은 엔비디아 초기 4년 동안 수익을 내지 못하다 벤처투자사의 지원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긴 바 있습니다.
 
컴퓨터 게임을 좋아했던 그는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내놓았고 성능을 인정받았으나, 고가에 호환성도 떨어져 다시 자금난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1997년 3D 처리가 가능한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내놓으면서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 때 다시 파산 직전까지 갔었고, 당시 젠슨 황은 연봉을 1달러로 줄이면서 위기를 돌파했습니다. 이때부터 젠슨은 사내 발표 때마다 “우리 회사는 앞으로 30일 후면 파산한다”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위기감과 절박함을 잊지 말자는 경고이자 독려였습니다.
 
 
지난해 3월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와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서로의 옷을 바꿔입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 인스타그램)
 
엔비디아, 혁신에도 줄위기
 
위기를 넘긴 엔비디아는 이후 큰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자체 플랫폼 ‘쿠다(CUDA)’를 통해 GPU의 병렬 계산 능력을 그래픽에서 과학 시뮬레이션, 데이터 분석 등 여러 분야로 확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엔비디아는 평탄치 않았습니다. 경쟁사들이 즐비했고,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초라한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범프게이트’로 기업 가치가 90% 가까이 폭락했으며 모뎀 시장에서는 아예 발을 뺐습니다. 반면 쿠다는 이용자도, 수익률도 저조했습니다. 오직 소수의 연구자들만이 쿠다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활용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젠슨은 쿠다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010년대 들어 쿠다는 정체된 AI 업계에 활력을 제공했습니다. 특히 주목된 게 신경망으로, AI 모델을 인간의 뇌처럼 학습시키는 방식입니다. 천문학적인 학습량이 필요했는데, 엔비디아의 병렬 처리가 가능한 GPU와 GPU를 그래픽카드 외의 분야에서 사용 가능하게 하는 쿠다가 ‘딥러닝’에 특화돼 있던 것입니다.
 
지난 2023년 5월 젠슨 황 에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미국 실리콘밸리의 한 일식당에서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사와스시 페이스북 화면 캡쳐)
 
알파고와 챗GPT 등 AI가 흥행하면서 엔비디아 수요도 급증했습니다. 2015년에는 주가가 무려 66%나 올라 2001년 이후 처음으로 역대 최고가를 갱신했습니다. 엔비디아 제국의 완성이었습니다. 시총 1위와 시장점유율 90%라는 경이적 기록에 대해 월 스트리트의 애널리스트는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AI 분야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엔비디아는 유일한 무기상이다.”
 
1993년 동료들로부터 CEO를 제안받은 젠슨이 세계적 CEO로 발돋움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30년이 넘습니다. 실리콘밸리의 어느 기업들보다도 늦은 기록입니다. 성공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습니다. 오래 걸렸지만, 그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증명해 냈습니다.
 
안정훈 기자 ajh76063111@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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