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유지웅 기자] 한·미 통상협상의 핵심 사안으로 '대중 수출규제'가 급부상했습니다. 미국은 반도체 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하면서도, 우리 기업 공장은 예외로 허용해 줬었는데요. 최근 이를 철회하는 방안을 검토 중입니다. 상호관세 부과 유예 기한이 2주도 남지 않는 상황에서, 협상력을 높이려는 전략으로 풀이됩니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기술봉쇄 전략이 심화하는 가운데, 규제가 현실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G2 기술패권 전쟁에…엔비디아 이어 삼성·하이닉스도?
25일 <뉴스토마토> 취재를 종합하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중국 내 공장에 대한 미국산 장비 공급을 제한한다는 방침을 통보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로 처음 알려진 이 사실은 전날 조셉 윤 미국대사대리 초청 세미나에서 공식화됐습니다. 그는 '미 당국이 한국 반도체 기업의 중국 공장에 대한 규제 방침을 밝혔다는 보도가 나왔다'는 질문에 "중국에 의한 기술 탈취 등을 막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현재 모든 상품과 투자가 중국으로 가고 있다"며 "중국에 투자하면 파트너십을 맺어야 하는데, 그 파트너는 전체 투자를 통제한다"고 부연했습니다. 이어 "첨단기술 관련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으며 지적재산권 도난 문제도 굉장히 심각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실제 미국 측의 명분은 충분합니다. 미 무역대표부(USTR)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합작투자 의무화 등 외국인 소유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중국에 진출한 미국 기업에 기술을 이전하도록 유도하거나 사실상 강요해 왔습니다.
기술 이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땐 해외 기술을 훔치기 위해 지식 재산권 절도에 가담하고, 이를 자국 산업 발전에 활용한다는 게 미 전략국제연구소(CSIS) 분석입니다.
최근엔 미국 기업이 중국의 '기술 굴기'를 이뤄낸 장본인이란 지적도 나옵니다. 애플은 수백만명의 중국 현지 근로자·부품업체를 대상으로 첨단 생산 기술을 교육하기 위해 미국인 엔지니어들을 파견했으며, 중국의 산업 역량을 크게 끌어올렸습니다.
이는 결국 같은 부품사로부터 납품받는 화웨이·샤오미 같은 중국 기업의 급부상으로 이어졌습니다. 미 스탠퍼드대의 최신 인공지능(AI) 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으로 미국과 중국의 상위 AI 모델은 주요 성능 측정에서 거의 동등한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2023년에는 중국이 대부분의 지표에서 미국에 두 자릿수 퍼센트 차이로 뒤처졌던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애플에 대해 전면적인 생산 기지 이전을 요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평가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강경합니다. AI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는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의 공개 반발에도, 미 상무부는 지난해 엔비디아의 고성능 AI 반도체인 H100·A100 중국 금지 조처를 내렸습니다. 올해엔 H20에 대해서도 사실상 전면 금지 수준의 규제를 도입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같은 조치를 유지하거나 더욱 강화할 방침이며, 삼성·SK하이닉스에 대한 장비 수출 제한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됩니다.
삼성전자의 시안 메모리반도체 공장. (사진=삼성전자)
"협상 지렛대일 뿐"…"삼성·SK도 예외 어려워" 엇갈린 전망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2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를 방문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중국 내 공장에 대한 미국산 장비 공급 제한 움직임에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과 쑤저우에, SK하이닉스는 우시·충칭·다롄에 반도체 공장을 두고 있으며, 두 회사는 전체 생산량의 약 40%를 중국에서 생산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만약 반도체 장비를 반입할 때마다 미국 정부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면, 장비 교체나 수리를 제때 하지 못해 생산 차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메모리 분야에서 중국 추격이 가속하는 가운데, 미국 제재가 한국 등 동맹국 기업에 더 큰 타격을 주는 구조입니다.
전문가들의 전망은 엇갈립니다. 채민숙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공급망 관점에서 한국 기업에 대한 장비·기술 도입을 차단하면, 결국 미국 내 주요 고객사가 부품 조달 비용 증가 등의 피해를 본다"며 "실제 장비 수출 허가 철회를 시행할 가능성은 작다"고 봤습니다.
김태황 명지대 교수도 "삼성·SK하이닉스 메모리 반도체는 미국 내에서 대체가 어려운 핵심 품목"이라며 "해당 장비 수출을 제한할 경우 미국 주요 IT 기업에도 부메랑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 정부는 이 조치를 한·미 관세 협상에서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적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며 "미국이 이들 공장에 대한 예외 조치를 철회한다면 이는 새로운 제재이며, 한국 정부가 강하게 반발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반면 양준석 가톨릭대 교수는 "엔비디아조차 결국 전량 수출이 막혔다"며 "같은 논리라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예외가 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신세돈 숙명여대 명예교수도 "중국 내 공장에 대한 미국산 반도체 장비 공급 제한은 한·미 관세협상에서 지렛대로 쓰일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라며 "이는 미국이 중국에 대해 갖고 있는 기술 견제 원칙에서 비롯된 '상수'로 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곽노성 동국대 명예교수는 "동맹국에도 예외 없이 관세를 부과하는 분위기에서, 삼성·하이닉스에 대한 예외를 기대하긴 어려운 상황"이라며 "바이든이 보조금으로 해외 기업을 자국으로 유도하려 했다면, 트럼프는 장비 규제를 통해 '손 안 대고 코 푸는 식'으로 압박을 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어 "현재 소비와 수출 등 국내 경제 여건이 아주 좋지 않은 만큼, 일자리만큼은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며 "미국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파악하고,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분야에서 거래를 보는 게 합리적"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유지웅 기자 wisema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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