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로봇이 바통 터치하는 하역…파시르판장의 거대한 진화
싱가포르 '파시르판장' 현지 르포
투아스 메가 허브 향한 징검다리
장비 스스로 충전하고 밀착 적재
전기 AGV 도입…탄소 50% 감축
2026-06-04 15:03:25 2026-06-04 16:33:28
[싱가포르=뉴스토마토 윤영혜 기자] 지난달 28일 찾은 싱가포르 남서부 해안의 파시르판장(Pasir Panjang) 터미널. 내부에는 53개의 선석이 끝없이 도열해 있었습니다. 국적선사 HMM(011200) 전용 선석에 들어서자 시야를 가득 채우는 압도적인 스케일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아파트 수십 층 높이의 거대한 연두색 안벽(배를 대는 부두 벽) 크레인 아래로, 2만40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초대형 선박 ‘코펜하겐호’가 닻을 내리고 웅장한 위용을 드러냈습니다. 길이만 약 400m, 축구장 4개를 이어 붙인 크기에 맞먹는 ‘바다 위 요새’입니다. 거대한 메가 캐리어의 짙은 남색 선체 위로는 형형색색의 수출입 컨테이너들이 산맥처럼 빽빽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싱가포르 파시르판장 터미널 전용 선석에 정박한 HMM 코펜하겐호. (사진=뉴스토마토)
 
수동 하역서 첨단 기술 시연으로
 
거대한 영화 세트장 같은 파시르판장 터미널은 아날로그 방식의 기존 항만 인프라가 인공지능(AI) 기반 완전 무인화 시대로 넘어가는 진화의 현장입니다. 무인 장비와 인력이 혼재돼 ‘반자동화’ 상태로 운영 중인 이곳은 향후 100% 무인 시스템으로 가동될 투아스(Tuas) 신항의 완벽한 개장을 위한 거대한 ‘테스트베드’로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터미널 내부에 마련된 차세대 통제 센터 전시관은, 축구장 3300개 크기, 1337헥타르 규모의 단일 터미널 기준 세계 최대 자동화 항만이 될 투아스의 거대한 청사진을 디지털 데이터와 시뮬레이션으로 증명하는 산실이었습니다. 전시관 스크린 속 투아스 신항은 바다 위 안벽 크레인부터 야드 안쪽까지 인간 개입이 완전히 배제된 미래형 물류 지도를 명확하게 그리고 있었습니다. 오는 2040년 투아스 신항이 완전 개장해 모든 물류 기능을 넘겨받게 되면, 현재의 파시르판장 터미널은 정부에 부지를 반납하고 완전히 문을 닫게 됩니다.
 
전시관에서 영상으로 확인한 무인화 비전은 실제 터미널 하역 현장 일부 구역에서 시연되고 있습니다. 안벽 크레인이 선박 지붕인 해치 커버를 걷어내고 선창 깊숙한 곳에서 컨테이너를 지상으로 끌어내리면, 대기하던 현장 인력이 재빠르게 화물 결박 장치인 트위스트락(컨테이너 잠금장치)을 해체합니다. 크레인 오퍼레이터의 정밀한 조종과 지상 작업자들의 숙련된 손길이 맞물리는 구간은, 인간의 감각이 가장 필요한 아날로그 영역입니다.
 
사람 손을 거친 화물이 터미널 안쪽 무인화 테스트 야드로 들어서면, 향후 투아스 신항에 전면 도입될 첨단 로봇 릴레이를 미리 엿볼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통제된 안전 펜스 너머로 컨테이너가 진입하는 찰나, 인간의 흔적은 지워지고 기계들만의 정밀한 동작이 구현됩니다. 관제 시스템의 지시를 받으며 시연 중인 무인 자동화 차량(AGV)들은 정해진 궤도를 미끄러지듯 돌며 화물을 낚아채 나릅니다. 무게 28톤의 AGV는 수컷 코끼리 16마리와 맞먹는 65톤의 화물을 거뜬히 운반할 수 있습니다. 양방향 4륜 조향 시스템을 장착해 게걸음 형태의 측면 이동이 가능하며 최고 시속 25km로 주행합니다. 특수 주행 기술 덕분에 AGV는 복잡한 항만 교차로에서도 회전 반경을 최소화하며 유연하게 병목 현상을 피해 갑니다. 센서가 장착된 자동화 야드 크레인들은 컨테이너 블록, 열, 높이 정보를 실시간으로 식별해 최적 동선으로 화물을 밀착 적재합니다.
 
PSA 호라이즌 빌딩 전망대에서 본 파시르판장 터미널. 야드에 형형색색의 컨테이너가 쌓여 있고 해안선을 따라 수많은 안벽 크레인들이 줄지어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무게 배분까지 계산, 적재 순서 바꿔
 
투아스로 넘어갈 장비 동력 관리 기술 역시 파시르판장 현장에서 실전 검증을 거치고 있었습니다. 작업 중인 AGV와 크레인들은 스스로 자동 충전 포트로 이동해 전력을 보충합니다. 테슬라 전기차 충전기보다 9배 강력한 전용 충전 설비를 활용해 단 20분 급속 충전만으로도 6~8시간 연속 구동이 가능합니다. 8~10년 수명의 교체형 리튬 배터리와 자동 윤활 시스템을 적용해 유지보수 편의성을 끌어올렸습니다. 인간 노동력이 가질 수밖에 없는 피로도나 식사 시간 등 공백을 완전히 지우고 효율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것입니다. 인간에 의한 크레인 멈춤 현상이 사라지면서, 터미널은 365일 24시간 내내 동일한 속도로 숨 가쁘게 펌프질하는 거대한 심장처럼 움직입니다.
 
투아스 신항 자동화 운영의 신경 중추 역할을 담당할 차세대 통제 센터 시스템도 파시르판장에 미리 구현돼 데이터를 쌓고 있습니다. 통제 센터 내부 전면 스크린에는 선박과 화물 이동 경로가 실시간으로 표시됩니다. 통합 플랫폼인 터미널 운영 시스템은 수많은 장비의 실시간 위치 추적과 사고 알림을 한곳으로 모아 완벽하게 통제합니다. 수만 개의 컨테이너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동선은 AI가 실시간으로 연산해 밀리초 단위로 최적화합니다. 정밀한 ‘테트리스 게임’을 하듯 한정된 선석 공간을 100% 활용하기 위해 선석 플래너 시뮬레이션으로 하중 균형과 일정을 오차 없이 조율합니다. 출항 직전 배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무게 배분까지 계산해 적재 순서를 바꾸는 정밀함이 시스템의 핵심입니다.
 
지능형 시스템 구축은 운영 효율 극대화를 넘어 글로벌 항만 필수 과제인 ‘탈탄소’ 행보와도 직결됩니다. PSA(싱가포르 항만공사)에 따르면 기존 디젤 중심 장비를 기계식 공기 순환 장치로 에너지 효율을 높인 친환경 전기 AGV로 대체하며 현장 탄소배출량은 50% 감축됐습니다. 항만 유출입 트럭과 크레인의 동력을 대대적으로 전환하면서, 전 세계 해운 물류 업계가 마주한 환경 규제 장벽을 기술력으로 돌파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싱가포르 항만 당국은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절반으로 줄이고, 2050년 넷제로를 달성할 계획입니다.
 
*이 기사는 (재)바다의품과 (사)한국해양기자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됐습니다.
 
대형 디지털 스크린에 띄워진 미래 투아스 터미널 운영 시스템. (사진=뉴스토마토)
 
싱가포르=윤영혜 기자 yyh@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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