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뉴스토마토 윤영혜 기자] “제가 낸 아이디어니 직접 가서 해보겠습니다.” 2021년까지 9년간 경영기획실장으로 일하며 스스로 ‘고인물’이 됐다고 여겨, 곡물 사업의 글로벌 판을 직접 짜겠다며 총대를 메고 나선 정도식 전무. 김홍국
하림(136480)그룹 회장은 “괜찮겠느냐”며 우려 반 기대 반의 시선을 보냈습니다. 그로부터 5년째인 현재 그의 승부수는 완벽히 적중했습니다. 미국에 있던 사업 본부를 싱가포르로 전격 이전하고 국내 해운사 최초로 싱가포르 국적선을 띄워 원가를 획기적으로 낮추며, 해운사의 전통적 굴레를 벗어던지고 글로벌 곡물 메이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팬오션(028670)의 이야기입니다.
지난달 28일 싱가포르 핵심 상업 지구인 탄종파가(Tanjong Pagar) 월릭 스트리트에 위치한 최고층 랜드마크 구오코 타워에서 만난 정도식 싱가포르 법인장은 하림그룹이 지난 2015년 팬오션을 인수한 후 새롭게 시작한 곡물 사업을 진두지휘하며, 단순 운송을 넘어 독자적인 밸류체인을 구축해 글로벌 식량 상사로의 도약을 이끌고 있습니다. 1997년 팬오션의 전신인 범양상선으로 입사한 그는 벌크 영업을 거쳐 2004년 STX그룹 인수 이후 기획실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2015년 하림그룹 편입 전후로는 경영기획실장을 역임하며 회사 성장의 궤를 함께해 온 핵심 ‘기획통’입니다.
지난달 28일 싱가포르 상업 지구인 탄종파가 월릭 스트리트 구오코 타워 팬오션 사무실에서 정도식 법인장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싱가포르 국적선’으로 원가 혁신
팬오션은 본사 산하에 싱가포르, 미국, 브라질 법인을 100% 자회사로 두고 곡물 매입과 판매뿐만 아니라 벌크선 및 탱커선 영업 지원까지 총괄하는 통합 조직을 갖췄습니다. 곡물 트레이딩은 전 세계 주요 산지에서 옥수수, 대두, 밀 등 농산물을 직접 구매해 수요가 있는 국가에 판매하고 해상 운송까지 일괄 책임지는 사업입니다. 연간 취급 물량은 지난 2022년 161만톤에서 지난해 343만톤으로 3년 새 2배 이상(약 113%) 성장했습니다. 올해 곡물 트레이딩 부문에서만 물량 400만톤을 취급해 매출액 1조7000억원, 영업이익 60억원을 달성한다는 목표입니다.
정도식 전무가 이끄는 싱가포르 법인은 독자 자본금을 바탕으로 미국과 브라질 법인의 원산지 조달, 한국 사무소의 판매망을 유기적으로 엮어내는 컨트롤 타워 역할을 수행합니다. 현재 싱가포르 법인에는 정 법인장을 포함해 12명의 정예 인력이 근무 중입니다. 이를 중심으로 원산지 소싱을 전담하는 미국 법인(4명)과 브라질 법인(1명)의 현지 주재원들을 지휘해 세계 각국의 곡물 물동량을 조율하고 있습니다.
핵심 경쟁력은 국내 선사 중 유일하게 보유한 ‘싱가포르 국적선’에서 나옵니다. 팬오션은 선박 금융이 끝난 8만2000톤급 캄사르막스 벌크선 두 척을 싱가포르 법인에 현물 출자해 현지 국적선으로 등록했습니다. 선주가 세금 혜택과 인건비 절감을 위해 자국이 아닌 제3국에 선박을 등록하는 ‘편의치적(Flag of Convenience)’ 제도를 적극 활용한 것입니다. 아시아 물류 허브인 싱가포르는 해운업 유치를 위해 자국 국적선 선박 운영 수익에 대한 세금을 전액 면제해 줍니다. 정 법인장은 “트레이딩 수익과 해운 수익을 분리해 세금을 관리하고 있으며 외국인 선원을 고용해 실질적인 선원비 절감 효과를 톡톡히 거두고 있다”며 “해상 운임을 내부 선대로 선제 방어해 치열한 글로벌 곡물 입찰 시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정도식 법인장이 인터뷰가 끝난 후 사무실 입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하림 수요’ 업고 동남아 정조준
모기업 하림그룹의 막강한 구매력은 초기 시장 진입 당시 글로벌 메이저 기업들과 거래망을 구축하는 핵심 동력이 됐습니다. 정 법인장은 “글로벌 메이저 기업들은 전 세계 항구에 곡물 터미널을 갖고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아 초기에 어려움이 컸다”며 “하지만 2020년 미국 곡물 엘리베이터(EGT) 지분을 인수하며 안정적인 조달 기반을 갖췄고 우리 모기업이 1년에 400만톤의 곡물을 소비하는 엄청난 ‘큰손’이라는 사실을 협상 카드로 내세운 것이 시장에서 파워풀하게 먹혔다”고 진단했습니다. 사료협회를 비롯한 국내 주요 화주들에게 실시간 해운 시황을 투명하게 공유하고 최적의 구매 타이밍을 제시하는 상생 전략도 펴고 있습니다.
육류 소비가 급증하는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신흥 시장 공략에도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정 법인장은 “작년에만 베트남을 일곱 번 다녀왔는데 닭고기와 돼지고기 등 육류 소비가 엄청나 사료용 곡물 수요가 계속 커지는 시장”이라며 “글로벌 산지에서 확보한 물량을 동남아시아로 판매하는 영업은 싱가포르 법인이, 한국향 판매는 한국 사무소가 전담하는 투트랙 방식으로 수익성을 높여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2030년까지 연간 취급 물량 600만톤을 바탕으로 매출 2조원, 영업이익 100억원 달성이 목표입니다.
팬오션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종착지는 운송망과 상사 기능을 모두 품은 ‘글로벌 종합 물류 기업’입니다.
포스코인터내셔널(047050) 등 기존 종합상사들이 주도해 온 곡물 트레이딩 시장에 직접 뛰어들어 해운사의 한계를 깨고 화물을 직접 창출하고 유통하는 능동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새롭게 개척해 나가고 있습니다. 정 법인장은 “단순히 배로 화물만 나르는 데 그치지 않고 글로벌 대형 화주들이 원하는 거점에 직접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며 “장기적으로 대서양 지역 화주들과의 영업 접점을 늘리기 위해 트레이딩 중심지 스위스 제네바 등 유럽 주요 거점으로 지사망을 넓혀 진정한 글로벌 종합 물류 기업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선박에서 사료용 옥수수가 하역되고 있다. (사진=팬오션)
*이 기사는 (재)바다의품과 (사)한국해양기자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됐습니다.
싱가포르=윤영혜 기자 yyh@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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