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의 제언: 성장의 ‘운영체제’를 업데이트하라
2025-10-27 06:00:00 2025-10-27 06:00:00
2025년 노벨경제학상은 조엘 모키르, 필리프 아기옹, 피터 하윗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수상 이유를 담은 설명 자료 제목을 ‘정체에서 지속 성장으로’로 뽑았다. 인류 역사 대부분은 1인당 소득이 거의 늘지 않는 만성적 정체 상태였다. 인류가 처음으로 지속적인 성장의 시대로 진입했던 것은 18세기 산업혁명기였다. 아기옹과 하윗이 ‘창조적 파괴’라는 성장 엔진의 메커니즘을 수학적으로 규명했다면, 모키르는 애초에 18세기 유럽에서 그 엔진이 어떻게 점화될 수 있었는지, 그 ‘기원’을 파고든다.
 
모키르의 작업에 더 눈이 가는 이유는 그가 성장의 ‘엔진’ 이전에 성장의 ‘운영체제’를 탐구하기 때문이다. 모키르의 대표작 『성장의 문화(A Culture of Growth)』는 18세기 산업혁명이 기술혁신의 결과이지만, 그 기술혁신 자체가 1500~1700년 사이에 유럽의 지식인 집단에서 발생한 특정한 문화적 태동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지난 수십 년간 경제학계는 ‘좋은 제도’가 성장의 열쇠라고 강조해왔다. 제도는 ‘게임의 규칙’, 즉 재산권이나 법치와 같은 사회의 ‘소프트웨어’이며 혁신의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하지만 모키르는 제도도 중요하지만 문화가 더 결정적이라고 주장한다. 문화는 사람들이 믿는 것(신념), 무엇이 옳다고 여기는지(가치),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선호)의 집합인 ‘운영체제’로, 사람들에게 혁신을 추구하며 분투할 강력한 ‘동기’를 부여한다.
 
이 '성장의 문화'를 배양한 인큐베이터가 바로 ‘문예 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이라는 ‘아이디어의 시장(market for ideas)’이었다. 이 시장의 핵심 화폐는 돈이 아닌 동료 학자들의 ‘평판’이었으며, 지식의 공개 경쟁을 촉진했다. 프랜시스 베이컨 같은 ‘문화적 기업가(Cultural Entrepreneurs)’들은 이 시장에서 “지식은 유용해야 한다”는 ‘베이컨식 프로그램’을 설파하며 기존의 권위에 도전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성장의 문화’가 확산되면서, 이전까지 분리되었던 두 지식, 즉 ‘왜(why)’를 묻는 ‘명제적 지식’(p-지식, 과학 원리)과 ‘어떻게(how-to)’를 아는 ‘처방적 지식’(λ-지식, 기술 노하우)이 비로소 연결되기 시작했다.
 
이 ‘성장의 문화’가 어떻게 18세기 유럽의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했을까? 바로 이 두 지식의 ‘선순환 고리’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이론가(Savant)가 발견한 과학 원리는 기술자(Fabricant)의 발명을 맹목적인 시행착오가 아닌 체계적인 과정으로 만들었다. 역으로, 기술자가 만든 더 정교한 도구는 이론가가 자연의 비밀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명제적 지식이 처방적 지식을 돕고, 처방적 지식이 명제적 지식을 자극하는 이 선순환이야말로 지속 성장의 엔진이었다.
 
최근 세계적인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2025년 6월 19일자 기사에 따르면, 한국은 K-팝, 반도체, K-방산의 성공에 힘입어 ‘돌고래’로 성장했지만,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저출산으로 인한 성장 동력 고갈이라는 치명적 위기에 처해 있다. 모키르의 분석틀은 오늘날 한국이 직면한 이러한 도전에 귀중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 ‘극심한 양극화’는 우리 사회의 ‘문예 공화국’을 파괴하고 있다. 과학이나 정책마저 ‘증거’가 아닌 ‘정치적 진영’으로 재단하는 문화 속에서 ‘유용한 지식’은 생존할 수 없다. 둘째, ‘장기 성장 동력 고갈’은 우리의 ‘베이컨식 프로그램’이 멈췄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반도체 등 세계 최고의 ‘처방적 지식과 패브리컨트’를 가졌지만, ‘추격형 성장’의 문화에 갇혀 ‘왜’를 묻는 ‘명제적 지식과 사반트’를 경시해왔다. 이 두 집단의 단절은 ‘선도형 성장’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심각한 문화적 위기다. 미래는 R&D 예산을 늘리는 ‘제도’에 앞서, ‘문화적 기업가’들이 자유롭게 경쟁할 ‘아이디어의 시장’, 곧 ‘문예 공화국’을 업데이트하는 데 달려있다. ‘증거’가 존중되고 아이디어가 보상받는 환경, 그리고 기초과학과 산업기술이 서로를 자극하는 ‘선순환 고리’의 작동이 시급하다. 성장은, 결국, 문화다.
 
박종현 경상국립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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