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종용 선임기자] 정부와 여당이 금융소비자 보호를 명분으로 제도 개선을 추진하고 있지만, 줄줄이 해를 넘길 것으로 보입니다. 금융사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우는 방식으로 추진하는 것에 대해 위법성 시비에 휘말렸기 때문입니다. 금융사들이 소비자에 비용을 전가할 수 있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는 만큼 현실성 있는 제도 개선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은행 100% 책임은 위법"
25일 금융권에 따르면 은행법 개정안, 보이스피싱 배상 책임 확대 등 소비자 보호를 명분으로 한 법안들이 줄줄이 해를 넘기게 됐습니다. 여야 간 이견이 뚜렷한 데다 국회입법조사처에서도 타 업권과의 형평성 문제, 위법성 소지 등을 갖고 있어 보완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정부는 금융사에 보이스피싱 피해액을 일부 또는 전부 배상하도록 하는 '무과실 배상 책임제' 법제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억원 금융위원장도 최근 기자 간담회에서 "연내 통신사기피해환급법 개정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다만 야당이 "고의나 과실이 없는 금융사에 배상 책임을 지우는 것은 민법상 과실책임주의 원칙과 충돌할 소지가 있다"며 위법성을 주장하고 나서 관련 쟁점에서 뚜렷한 입장 차를 보이고 있습니다.
은행연합회가 법률 검토를 한 결과 관련 제도가 민사법상 과실책임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의견을 받기도 했습니다. 보이스피싱은 금융사가 단순 의심만으로 거래를 중단하기 어렵고, 통신사·수사기관·정부 등 각 주체의 책임이 나뉘어 있는 상황에서 금융기관에 모든 책임을 지우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국회 정무위원회 관계자는 "국회 주도 입법보다는 정부 입법으로 추진하자는 것으로 정리가 됐다"며 "소관 부처인 금융위가 연내 법안을 발의하면서 국회서 보이스피싱 피해 입증책임 문제 등을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금융위는 보이스피싱 배상책임과 관련해 금융권과 TF(태스크포스)를 가동해 협의하고 있습니다. 금융위 관계자는 "무조건 금융사에만 배상책임을 지우는 게 아니라 소비자 보호를 위해 금융사가 최선의 노력을 했는지 등을 살펴볼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적극적인 차원의 소비자 보호 체계를 마련하도록 민관이 논의 중"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8월28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윤창렬 국무조정실장이 '보이스피싱 근절 종합대책' 합동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가산금리 손질법 '실효성 의문'
민주당 주도로 추진하고 있는 대출 원리금 상환 부담 완화도 여야 대치 속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은행이 대출금리에 각종 법적 비용을 전가하지 못하도록 막는 은행법 개정안을 두고 여야가 평행선을 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당의 발의한 은행법 개정안은 대출금리에 지급준비금, 예금보험료, 서민금융진흥원 출연금 등을 반영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것입니다. 기술보증기금·신용보증기금 등 출연금은 출연요율의 50% 이내 범위에서 대통령령 비율 이상 반영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은행 대출금리는 코픽스(COFIX·자금조달지수)나 금융채 등 지표금리(기준금리)에 가산금리를 더한 뒤 우대금리(가감조정금리)를 빼는 방식으로 정해집니다. 가산금리에는 업무원가, 법적비용, 위험프리미엄, 기대수익률 등이 포함되는데 여기서 법적비용인 출연금 등을 제외시켜 은행의 비용 부담을 대출차주에게 전가하는 것을 막겠다는 의도입니다.
민주당 지도부는 내년 증액 예정인 교육세도 대출금리에 전가하지 못하도록 본회의에 수정안을 제출할 계획으로 알려졌습니다. 다만 우대금리 혜택 축소 등 우회 방안이 많아 실효성에 의문이 붙고 있습니다. 금융위도 국회에 "대출 가산금리 구성요소 중 법적 비용의 일부 항목을 제외하더라도 은행이 목표이익률 등 다른 항목을 상승시키거나 우대금리를 축소하면 대출금리 인하 효과가 크지 않을 수 있다"고 의견을 제출했습니다.
금융당국 한 관계자는 "야당에서 반대를 하고 있는 데다 소관 부처(금융위)가 사실상 반대 의견을 낸 상황에서 법안을 무리하게 추진하기는 당장 어렵다"며 "은행법 개정안이 본회의 신속처리안건에서도 제외된 만큼 당분간 공방 속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습니다.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정무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은행 대리업' 시범 운영도 불투명
은행 대리업 도입도 해를 넘기게 됐습니다. 금융위는 지난 9월 주요 은행이 은행 대리업 시범운영을 위해 신청한 혁신금융서비스 지정과 관련해 검토 중입니다. 은행권에서는 조만간 시범운영 관련 혁신금융서비스 지정이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혁신금융서비스 지정이 이뤄진다고 해도 물리적인 시간을 감안하면 연내 시범운영 개시는 힘들 전망입니다.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이 되어야 위탁 영역이 정해지고 우체국이 대리하기 위한 과정을 진행할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우체국은 전산 시스템 마련에도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한 만큼 연내 서비스 개시는 어렵다고 전망했습니다.
여야 의원들이 은행대리업 도입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은행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금융사고 발생과 이에 따른 고객 피해 발생 때 책임 소재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비은행기관이 은행대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금융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고 소비자 피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국회에서는 은행대리업자에 대한 내부통제 감독과 금융사고 책임 의무를 은행에 지우겠다는 방침입니다.
은행권에서는 타 업권과의 형평성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실제로 보험업법에 따르면 보험대리점의 불법행위에 대해 보험사는 통상적인 지휘·감독 범위 내의 책임을 부담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고의적 사기나 중대한 과실에 대해 대리점에게 직접 책임을 추궁하도록 하고 있으며, 보험사가 적정한 관리 감독을 게을리 했을 경우 보험사 책임이 성립되는 구조입니다.
은행 대리업 도입은 다른 금융법에 비해 여야 간 이견이 덜하지만, 이대로 도입될 경우 정식 사업에 참여하는 은행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그간 은행업 대리업이 지지부진 한 것도 수수료 등 서비스 대가를 어떻게 책정할지 위수탁자 간 접점을 좁히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불완전판매 등 금융사고 책임 문제가 위탁자(은행)에 쏠릴 경우 사업에 뛰어들 은행이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습니다.
우체국과 시중은행은 업무제휴 방식으로 입출금·조회 등 제한적인 금융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서울 서울중앙우체국 창구에 시중은행 입출금 업무 안내 포스터가 붙어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이종용 선임기자 yong@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의중 금융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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