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에 개봉한 영화 <나는 부정한다>의 도입부는 인상적이다. 홀로코스트(Holocaust)에 대한 이견을 존중하고 원인과 방식에 대해 논쟁할 수 있지만 학살 그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과는 토론하지 않는다는 데보라 립스타트(레이첼 와이즈 역)의 강연 발언이 그것이다. 이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에게 합법성과 자격이 없는 그들에게 공적 위상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거짓은 논쟁이 되는 순간 권위를 얻는다. 데보라 립스타트가 사실을 두고 논쟁하지 않는다고 한 건 그런 이유에서다.
거짓을 진실로, 모순을 논쟁으로 치환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음모론이다. <나는 부정한다> 속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인 데이비 어빙(티모시 스폴 역)은 홀로코스트가 보상금을 얻기 위한 유대인의 괴담이라는 등의 음모론을 내세운다. 또한 독가스인 치클론B를 내려보낸 건물 기둥에 구멍이 발견되지 않은 점을 지목하며 유대인 수용소에 가스실이나 처형 시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No Holes No Holocaust”는 홀로코스트 부정의 중요한 선전 문구가 됐다. 역사를 동원의 도구로 활용하는 건 유사역사학계가 보이는 전형적인 행태다.
음모론은 객관적인 사실이나 과학적 검증보다 대중의 신념이나 감정에 적극 기댄다. 그렇게 함으로써 탈진실(Post-truth)의 형태로 나아간다. 여기에 정치 이념과 진영이 버무려지면 강고한 프레임도, 정치적 힘도 얻게 된다. 거짓은 그렇게 기민하게 대중을 기만한다.
역사는 끊임없이 정치의 장으로 불려왔다. 나치 독일에서 ‘위대한 아리아인’은 유럽 인종주의와 우월주의 사상을 내세운 강력한 무기였다. 또한 고대 유럽 전역에 분포한 아리아인의 순수성을 가장 잘 보존한 게르만족이 세계를 정복하고 다른 민족을 지배해야 한다는 나치 주장에 당위성을 부여했다. 여기에는 우생학의 사이비 과학도 한몫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동아시아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동양삼국동맹론이나 대동아공영권, 일선동조론이나 임나일본부설 등을 내세웠다. 역사를 선과 악의 대립으로 비틀어 우리와 적을 구분했고, 동원과 결속을 강화하는 매개로서 활용했다.
최근 '환단고기'가 재소환됐다. 이재명 대통령 입을 통해서였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업무보고를 받은 이 대통령은 “환단고기는 문헌이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진위나 의도와 관계없이 해당 발언은 상당한 논란을 불러왔다. 과거 민족의 위대성을 강조하거나 민족 정체성을 자극하고자 한 이들에게 환단고기는 가슴 웅장한 매력적인 책으로 읽혔다. 이를 부정할 경우 식민사관이라는 공격이 이어졌다.
환단고기는 한국의 상고사를 고조선 이전인 기원전 7199년까지 끌어올렸다. 한반도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동서 2만리, 중앙아시아에서 인도 북부, 그리고 시베리아까지 남북 5만리를 차지하는 등 한민족이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한 대제국을 건설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결정적인 근거는 없다. 현대의 어휘와 지명이 사용되고 시대적 오차도 곳곳에서 발견됐다. 학계에선 오래전 여러 입증을 통해 그 허무맹랑한 주장이 역사서로서 가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때문에 더 이상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논박하는 대상이 될 수 없다. ‘사이비 역사서’로 이미 규명이 끝난 사안인 것이다.
역사학자 박광용 선생은 1990년 <역사비평>에 기고한 논문에서 환단고기를 신일본주의 입장에서 친일적 민족주의 요소가 강한 책이라고 평가했다. 조선과 일본 문화의 근원이 같다는 암시는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한 일본 제국주의 극우 사관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근거가 됐다. 국내에서 반향을 일으킨 건 그 이후의 일이었다. 1979년 이유립이 스승인 계연수의 유지를 받아 출간했다는 환단고기는 일본과 고대 조선사의 연관 부분에 관심을 보인 일본인 변호사 가지마 노보루(鹿島昇)가 1982년 번역한 것이 역수입되면서 열풍을 불러왔다. 가지마는 환단고기를 통해 일본의 기원을 단군 조선으로까지 끌어올리고자 했다. 나아가 일본의 뿌리인 신도(神道)가 본류이고 조선의 단군이 지류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주어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바뀌었을 뿐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측면에서 환단고기를 옹호하는 왜곡된 민족주의 사관과 일본 제국주의의 대아시아주의를 모방하거나 그 뿌리를 공유하는 친일 매국사관은 이질동형성을 갖는다.
거짓은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논쟁이 되는 순간 재해석이나 역사적 입장 차로 둔갑한다. 정치의 장으로 옮겨 온 역사가 위험한 건 그런 이유에서다. 왜곡된 역사와 날조된 거짓이 정치 이념을 통해 권위를 얻기 때문이다. 환단고기가 역사적 해석과 관련 “입장들의 차이”쯤으로 소환되는 건 그래서 더 우려스럽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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