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사이언스)“기억력은 한순간 급격히 무너진다”
1만여건의 뇌 스캔이 밝힌 진실
뇌 손상 요인을 미리 차단해야
2026-01-16 14:29:45 2026-01-16 14:29:45
나이가 들면 건망증이나 인지장애를 겪게 됩니다. 어제 먹은 저녁 메뉴가 기억나지 않거나, 친한 지인의 이름이 혀끝에서 맴도는 경험은 노화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우리는 흔히 기억력 감퇴가 나이를 먹음에 따라 촛불이 타들어가듯 ‘서서히’, ‘일정한 속도’로 진행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근 발표된 대규모 의학 연구는 이런 통념과 상당히 다릅니다. 뇌의 구조적 변화와 기억력 상실의 관계는 완만한 내리막길이 아니라, 특정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급격히 무너져 내리는 ‘절벽’에 가깝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하버드 의대 산하 히브루 시니어라이프(Hebrew SeniorLife)의 힌다 앤 아서 마커스 노화연구소(Hinda and Arthur Marcus Institute for Aging Research)를 포함한 국제 공동 연구팀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에 뇌 노화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메가 분석(Mega-Analysis)’이라 불리는 이번 연구는 세계 13개 연구 코호트에서 수집된 3700명의 인지적으로 건강한 성인 데이터를 통합 분석한 것입니다. 1만 건이 넘는 MRI 스캔과 1만 3천 건 이상의 기억력 테스트 결과가 이 거대 분석의 기초자료가 되었습니다.
 
뇌가 초기의 구조적 손상을 어느 정도 견뎌내다가, 한계점에 도달하면 방어벽이 무너지듯 인지 기능이 급격히 쇠퇴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의료진이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양전자단층촬영(PET) 스캔 결과를 분석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완만한 내리막길 아니라 ‘절벽’
 
이번 연구 결과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뇌 위축과 기억력 감퇴 사이의 연결고리가 ‘비선형적(nonlinear)’이라는 점입니다. 연구진의 분석에 따르면, 뇌의 구조적 손실이 초기 단계일 때는 기억력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거나 완만하게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뇌 조직의 축소가 특정 수준을 넘어서는 순간, 기억력 감퇴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습니다. 뇌 구조 손상률이 평균 이상인 사람들은 단순히 비례적인 수준을 넘어, 불균형적으로 훨씬 더 심각한 기억력 저하를 겪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뇌가 초기의 구조적 손상을 어느 정도 견뎌내다가, 한계점에 도달하면 방어벽이 무너지듯 인지 기능이 급격히 쇠퇴한다는 ‘가속화 현상’을 보여줍니다.
 
더 주목할 점은 이 현상이 우리가 흔히 기억의 저장소로 알고 있는 ‘해마(hippocampus)’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번 연구에서도 해마의 부피 감소는 기억력 저하와 강력한 상관관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연구팀은 기억력 감퇴가 해마라는 단일 부위의 문제가 아니라, 대뇌 피질과 피질 하부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뇌 영역의 구조적 취약성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해마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구조적 변화의 영향력은 뇌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결국 기억력의 상실은 뇌의 특정 부품 하나가 고장나는 게 아니라, 뇌라는 거대한 네트워크 시스템 전체의 구조적 건전성이 무너지는 과정임을 시사합니다.
 
이번 연구는 알츠하이머병의 발병 원인을 유전자에만 돌리던 기존의 시각에도 변화가 필요함을 밝혀냈습니다. 연구진은 이번에 확인된 뇌 구조의 위축과 기억력 감퇴의 가속화 패턴이 알츠하이머의 대표적 위험 인자인 ‘APOE ε4’ 유전자 보유 여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유전적으로 알츠하이머 고위험군이 아니더라도, 뇌의 구조적 위축이 누적되면 누구나 급격한 기억력 저하의 ‘절벽’을 만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연구를 주도한 하버드 의대 알바로 파스쿠알-레오네(Alvaro Pascual-Leone) 교수는 이를 두고 “기억력 감퇴는 단순한 노화의 결과물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번 연구 결과가 기억력 저하를 단 하나의 유전자나 뇌의 한 영역 탓으로 돌릴 수 없음을 보여주며, 대신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뇌 구조의 광범위한 생물학적 취약성이 임계점을 넘어설 때 발생하는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연구는 기억력 감소와 관련된 뇌 변화가 단순한 나이의 문제에 그치지 않으며,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개별적인 취약성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밝혀낸 중요한 연구입니다. 이 발견은 기억력 저하를 예방하고 개선하기 위한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하며, 향후 노인성 질환에 대한 보다 정확한 진단과 치료 방안을 찾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번 연구는 뇌의 구조적 변화는 수면 아래서 조용히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급격한 기억력 상실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뇌가 ‘절벽’에 다다르기 이전인 중년기부터 뇌의 전반적인 건강을 관리하고 구조적 위축을 막기 위한 선제적인 개입과 예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외국어 학습이나 악기 연주처럼 뇌에 낯선 자극을 지속적으로 주면 뇌의 급격한 기능 저하를 막을 수 있다. 바둑대회에 참가한 어르신들이 바둑 경기를 치르고 있다.(사진=뉴시스)
 
뇌에 자극 줘 신경망 촘촘하게
 
전문가들은 이 연구가 입증한 ‘뇌의 구조적 절벽’을 피하기 위해서는 뇌의 내구성을 높이고 손상 요인을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인지 예비능(Cognitive Reserve)’의 축적입니다. 외국어 학습이나 악기 연주처럼 뇌에 낯선 자극을 지속적으로 주어 신경망을 촘촘하게 만들면, 노화로 인해 뇌의 일부가 물리적으로 위축되더라도 우회 도로가 형성되어 급격한 기능 저하를 막을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철저한 혈관 관리가 필수적입니다. 뇌세포를 위축시키는 주범인 고혈압과 고혈당을 중년기부터 엄격히 통제하여 뇌로 향하는 영양 공급로를 지켜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선제적 방어’ 시스템의 가동입니다. 건강할 때 뇌 구조를 점검하고 뇌의 노폐물 청소 시간인 수면을 충분히 확보함으로써, 뇌 조직의 마모 속도를 늦추고 구조적 임계점에 도달하는 시기를 최대한 늦춰야 합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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