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경영을 찾아서)라 베르마의 연기: 성과 지표(KPI)와 진정성의 충돌[인사혁신]
13 / 관계의 총체성으로 쓰는 프루스트의 비즈니스 서사
2026-05-13 14:53:30 2026-05-13 16:12:32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화자는 전설적인 여배우 라 베르마의 공연 관람을 오랫동안 고대한다. 극장을 찾으면서 그는 그녀의 연기에서 특별한 기술, 즉 찬란하게 빛나는 기교의 순간들을 포착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정작 무대 위 라 베르마의 연기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투명하여, 화자는 그녀가 무엇을 특별하게 잘하고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당혹감에 빠진다.
 
"나는 그녀의 연기에서 어떤 고립된 아름다움, 내가 비평가들의 글에서 읽었던 그 찬란한 대목들을 찾아내려 애썼다. 그러나 라 베르마의 목소리, 몸짓, 시선은 극 전체와 너무나 완벽하게 통합되어 있어서, 무엇이 기교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분리해낼 수 없었다. 그녀의 연기는 단지 존재 그 자체였으며, 그 투명함 속에서 나는 오히려 내가 기대했던 '위대한 연기'라는 가시적인 성과를 놓치고 말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재구성.
 
소설의 이 문학적 일화는 현대 기업의 성과 관리 체계가 직면한 가장 아픈 지점을 찌른다. 우리가 지표(KPI)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구성원의 기교와 숫자를 측정하려 들 때, 정작 그 업무의 본질인 진정성과 총체적 가치는 투명하게 사라져버리는 역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현대 기업들이 보편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핵심성과지표(KPI)는 자칫 기업 업무의 본질적 가치를 퇴색시키거나 없애버리는 역설적 상황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미지=챗GPT)
 
가시적인 지표와 보이지 않는 본질의 해리
 
현대 경영의 성과 관리는 오랜 시간 동안 "측정할 수 없는 것은 관리할 수 없다"는, 비록 이것이 오용되는 측면이 있음에도, 피터 드러커의 격언에 충실했다. 수치화한 KPI(Key Performance Indicator, 핵심성과지표)는 조직의 목표를 명확히 하고 구성원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효율적인 도구로 군림했다. 그러나 라 베르마의 연기처럼, 최고의 성과는 흔히 지표라는 그물망에 걸리지 않는 '투명한 통합'의 상태에서 발생한다.
 
'투명한 통합'은 소설 속에서 화자가 라 베르마의 연기를 묘사할 때 사용된 표현이자, 동시에 프루스트의 문학을 설명하는 이론의 키워드이다. 프루스트에게 훌륭한 예술이란 매개체(배우의 기술이나 작가의 문체)가 그 자체로 도드라지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완벽하여 그 뒤에 숨겨진 진실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상태를 의미한다. 예컨대 배우의 발성이나 몸짓이 개별적인 성과로 인식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전체적인 진실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된다는 논리인데, 수긍하게 된다.
 
경영의 맥락에서 투명한 통합은 긍정심리학의 거장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정립한 '플로(Flow, 몰입)' 개념과 깊이 맞닿아 있다.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저서 『몰입(Flow)』을 통해 유명해진 이 개념은, 인간이 어떤 활동에 완전히 빠져들어 시간의 흐름조차 잊고 자아 의식이 사라지는 최적의 경험을 뜻한다. 칙센트미하이에 따르면 몰입은 자신이 가진 기술 수준과 과제의 난도가 완벽한 균형을 이룰 때 발생하며, 이때 인간은 일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투명한 통합을 경험한다.
 
문제는 이러한 몰입이 KPI의 숫자 안에서 발굴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몰입의 핵심 조건은 명확한 목표, 즉각적인 피드백, 그리고 도전과 기술의 균형인데, 기존의 KPI는 대개 사후적인 결과 측정에만 집착하며 실시간의 피드백보다는 보상을 위한 통제 수단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라 베르마가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 인물 그 자체가 되었듯, 몰입 상태의 직원은 KPI라는 외부의 잣대를 의식하지 않고 업무 본연의 가치에 녹아든다. 아이러니하게도 경영진이 이 몰입의 결과를 숫자로 쪼개어 측정하고 보상과 연계하려 드는 순간, 직원의 의식은 다시 평가라는 외부 세계로 튕겨져 나오며 투명한 통합은 깨어지고 만다. 외부적 동기(보상)가 내재적 동기(즐거움과 의미)를 몰아내는 것이다. 만일 라 베르마가 만약 '관객의 박수 횟수'나 '특정 대목의 성량 데시벨'을 KPI로 부여받았다면, 그녀는 결코 예술의 최고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굿하트의 법칙(Goodhart's Law)'이 소환된다. 1975년 영국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가 통화 정책의 한계를 지적하며 정립한 이 법칙은 현대 성과 관리의 모순을 날카롭게 꿰뚫는다.
 
"어떤 지표가 목표가 되는 순간, 그 지표는 더 이상 좋은 지표가 아니다(A measure becomes a target, it ceases to be a good measure)."
 —찰스 굿하트
 
본래 지표는 현실을 '측정(Measure)'하고 그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유용한 정보여야 한다. 그러나 지표 자체가 '목표(Target)'가 되는 순간, 사람들은 현실을 개선하기보다 지표라는 숫자 자체에 집중하여 조작하기까지 하는 '게임화(Gaming)' 전략에 돌입한다. 지표는 오직 '정보'일 때만 유효하며, '달성 대상'이 되는 순간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게 되는 얘기다.
 
예를 들어, 콜센터의 KPI를 '통화 시간 단축'으로 설정하면 지표상으로는 효율성이 좋아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상담원은 지표를 맞추기 위해 고객의 말을 자르고 서둘러 전화를 끊기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지표는 개선되지만, 고객 만족도라는 실재하는 가치는 파괴된다. KPI 설계의 근본적 한계를 보여준다. 모든 가치를 수치화할 수는 없으며, 수치화 시도가 도리어 시스템에 적응하는 인간의 본성을 자극해 창의성, 신뢰, 관계와 같은 소중한 질적 가치의 붕괴를 초래하는 상황이 우려된다.
 
성과 지표의 독성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Edward Deci)와 리처드 라이언(Richard Ryan)의 '자기결정 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은 인간의 동기가 외부의 보상이나 압박이 아닌, 자율성(Autonomy), 유능감(Competence), 관계성(Relatedness)이라는 세 가지 기본 심리적 욕구에서 비롯한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며,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 가장 강력한 몰입을 경험한다.
 
KPI를 통한 외부의 강압적인 측정과 성과에 따른 보상은 이 내재적 동기를 파괴하는 '과잉 정당화 효과(Overjustification Effect)'를 낳는다. 즐거워서 하던 일도 돈이나 숫자로 보상을 받기 시작하면, 그 일은 더 이상 '나의 일'이 아니라 '보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라 베르마가 만약 박수 횟수나 커튼콜 횟수 같은 수량적 지표에만 몰두했다면, 그녀는 박수를 유도하는 작위적인 연기에 치중했을 것이며 결코 그 투명한 통합의 지경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창의성이 요구되는 지식 노동 현장에서 숫자로 치환된 보상은 구성원으로 하여금 '내가 이 일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 대신 '어떻게 하면 이 숫자를 맞출 것인가'라는 질문에 매몰되게 하여 결국 영혼 없는 기계적 성과만을 남긴다.
 
딜레마
 
그렇다면 측정의 이러한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경영학은 이제 숫자의 엄밀함을 넘어 가치의 깊이를 측정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대안 중 하나가 '사회적 투자 수익률(S-ROI, Social Return on Investment)'이다. S-ROI는 재무적 성과 뒤에 숨어 있는 사회적, 환경적, 심리적 가치를 화폐 단위로 환산하여 측정하려는 노력이다.
 
물론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라 베르마의 연기가 관객의 영혼에 남긴 긴 여운이나 정서적 회복, 혹은 공연을 본 후 삶의 태도가 바뀐 경험 등은 엄밀히 말해 수치화가 가능하지 않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객관적 설명이 불가능한 개별적 진실에 머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업이 S-ROI와 같은 다차원적 척도를 도입하려 애쓰는 이유는, 기존의 단편적인 숫자가 놓치고 있는 가치의 총체성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기 위함이다.
 
SK가 추진하는 '더블 보텀 라인(Double Bottom Line, DBL)' 경영이 이 맥락에 위치한다. SK는 경제적 성과뿐 아니라 기업 활동을 통해 창출한 사회적 성과를 화폐 단위로 측정하여 관리한다. 단순히 기부나 사회공헌 금액을 계산하는 것을 넘어, 제품 생산공정의 환경 영향, 노동환경 개선, 동반성장 등을 종합적으로 가치화하려는 시도다.
 
해외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이 있다. 바스프, SAP, 노바티스 등 30여개 글로벌 대기업이 참여한 VBA(Value Balancing Alliance)는 기업의 사회적·환경적 임팩트를 화폐 단위로 표준화하기 위한 방법론을 개발하고 있다. VBA와 함께,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임팩트 가중 회계(Impact-Weighted Accounts, IWA) 등 다양한 시도가 병렬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버드의 IWA는 기업 재무제표에 긍정적·부정적 임팩트를 직접적으로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투자자가 기업의 진정한 가치를 재무적 관점에서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젝트로 추진 중이다.
 
SK가 추진하는 '더블 보텀 라인(Double Bottom Line, DBL)' 경영은 경제적 성과뿐 아니라 기업 활동을 통해 창출한 환경 영향, 노동환경 개선, 동반성장 등 사회적 성과를 화폐 단위로 측정해 관리한다. (사진=뉴시스)
 
진정성의 거버넌스와 서사적 전환
 
인사 혁신의 선구적 기업들은 이미 지표 중심의 통제에서 벗어나 맥락 중심의 관리로 전환하고 있다. 2012년경, 글로벌 소프트웨어 기업인 어도비(Adobe)는 매년 한 차례 수천 명의 직원을 등급별로 줄 세우던 연례 성과 등급제가 들이는 비용 대비 실질적 성과 개선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성과 측정 방식을 바꿨다. 등급 결정에만 엄청난 행정적 비용이 발생할 뿐만 아니라, 평가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시장 상황이 변해버리는 시차의 오류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이에 어도비는 등급제를 폐지하고 상사와 직원이 수시로 대화하며 목표를 조정하는 '체크인(Check-in)' 시스템을 도입했다. 숫자로 직원을 규정하기보다 실시간 상호작용이라는 맥락 속에서 성장을 돕는 방식이다.
 
넷플릭스(Netflix) 역시 비슷한 궤적을 그린다. 넷플릭스는 복잡한 지표 중심 통제보다 자율성과 맥락 공유를 중시("Context, not Control")하며, 솔직한 피드백 문화를 통해 구성원이 스스로 판단하고 의사결정하도록 하는 조직 운영 방식을 발전시켰다. 넷플릭스 경영진은 숫자로 환산된 등급이 구성원 간의 불필요한 경쟁을 유발하고 창의적 몰입을 저해한다고 판단했다. 대신 그들은 모든 정보와 맥락을 투명하게 공유하여 구성원 스스로가 최선의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자율성을 부여했다. 수치화 지표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와 대화라는 유동적인 관계가 성과의 본질임을 깨달은 결과였다.
 
KPI를 넘어서
 
당연히 진정성만으로 경영이 지속될 수는 없다. 통제 없는 조직이나 성과 관리 없는 경영은 성립하지 않는다. 다만 기존 KPI의 경직성을 대체할 대안들을 통해 지표를 '족쇄'가 아닌 '대화의 도구'로 활용하는 데 집중하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직원이 업무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조성하느냐가 목적이다.
 
구글이 채택한 OKR(Objectives and Key Results)은 고정된 숫자가 아니라 도전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그 과정을 학습의 기회로 삼음으로써, 직원이 자신의 기술을 확장하고 난도 높은 과제에 도전하는 플로의 조건을 충족한다. 또한 CFR(Conversation, Feedback, Recognition) 시스템은 측정보다는 구성원 간의 지속적인 대화와 피드백에 무게를 두어, 결과가 도출되는 과정의 진정성을 확보하고 동료 간의 관계성 욕구를 채워준다.
 
결국 대안적 성과 관리의 핵심은 '얼마나 많이 했는가(Output)'라는 결과의 양이 아니라, '어떤 가치 있는 변화를 일으켰는가(Impact)'라는 영향력에 주목한다. 넷플릭스의 철학처럼 규정과 지표로 통제하기보다 충분한 맥락을 공유하여 구성원이 스스로 플로를 경험하게 하는 것. 그러한 접근법이 더 강력한 성과를 창출하는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라 베르마가 관객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극의 진실에만 몰입했을 때 최고의 찬사를 받았듯, 직원 역시 지표의 감옥에서 벗어나 일의 목적에 완전히 동화할 때 비로소 투명한 통합의 성과를 내놓을 수 있다.
 
[안치용의 Critique: 지표는 나침반이지 족쇄가 아니다]
 
라 베르마의 연기를 보며 화자가 느꼈던 당혹감은, 오늘날 우리가 잘 설계된 KPI를 보면서 정작 본질이 빠져 있다고 느끼는 상황과 일맥상통한다. 우리는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믿고 싶어 하지만, 정작 가장 위대한 가치는 숫자가 비워진 그 투명한 틈새에서 생겨난다.
 
프루스트의 관점을 빌리면 우리가 어떤 대상을 알기 위해 동원하는 논리와 지표는, 그 대상의 살아있는 숨결을 죽인 뒤에야 작동하기 시작하며, 진정한 이해는 측정이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시작한다. 지표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려주는 나침반일 뿐, 그 길을 걷는 사람의 심장 박동과 발걸음의 진정성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이제 인사 혁신은 '어떻게 더 정확하게 잴 것인가'에서 '어떻게 진정성을 꽃피우게 할 것인가'로 그 좌표를 옮겨야 한다. 성과 측정의 목표는 측정이 아니라 성과이다. 
 
안치용 ESG비즈니스리뷰 발행인 겸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충범 테크지식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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