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진석 기자] "힘없는 아이들을 정치적 분노에 대한 분풀이 대상으로 삼는 것이 옳은가요."
2일 오전 11시쯤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 배재고 교문 앞에 설치된 화환들을 바라보던 학생 김모(17)군은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전날인 1일엔 화환이 13개가 설치됐는데, 이날 7개가 추가로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2일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 배재고 학생들이 교문 앞에 설치된 근조 화환들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배재고 앞에 늘어선 화환은 두 종류였습니다. 흰색 리본이 달린 조화는 전날 설치된 것으로 '승리보다 중요한 것은 존중입니다', '배재고 폐교를 애도합니다', '쓰레기 양성 교육 그만해라' 등 배재고 야구부 학생들이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했던 5·18 민주화운동 폄훼 발언을 규탄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분홍색 리본이 걸린 화환엔 '배운 배재고가 무시하자', '교사들은 학생들부터 우선 지켜주세요' 등 배재고 학생들을 응원하는 취지의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날 배재고는 기말고사 시험 기간이어서 오전 10시40분쯤부터 시험을 마친 학생들이 교문을 빠져나왔습니다. 학교 앞에 추가로 설치된 화환을 지켜보던 학생들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았습니다. 몇몇 학생들은 "부숴버리고 싶다", "왜 우리 학교 앞에 자꾸 화환이 도착하느냐"며 불만을 보였습니다.
배재고 인근 주민들 역시 학생들이 안타깝다는 입장입니다. 주민 김상현(35)씨는 "최근 부정선거 의혹과 내란 사태 등으로 극심해진 어른들의 정치적 갈등으로 배재고 학생들이 희생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며 "배재고 야구부 학생들은 잘못을 했으니 혼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야구부를 혼내는 것도 학교가 할 일이지 제3자의 몫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1일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 배재고 교문 앞에 배재고 야구부 학생들의 5·18 민주화운동 폄훼 발언을 규탄하는 근조 화환이 설치됐다. (사진=뉴스토마토)
충암고 이어 배재고 향한 정치적 분노
정치적·사회적 갈등으로 힘없는 학생들이 욕받이로 전락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지난 2024년 12월3일 윤석열씨가 일으킨 비상계엄 사태 이후 윤씨가 졸업한 서울시 은평구 응암동 소재 충암고엔 항의 전화가 빗발쳤습니다. 윤씨의 계엄에 가담, 내란 중요임무에 종사한 혐의를 받는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 모두 충암고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언론에선 이들을 '충암파'라고 칭했고, 급기야 학생들과 교직원을 향한 비난으로까지 이어진 겁니다.
결국 12·3 계엄 일주일 만에 충암고는 학생과 교직원의 안전을 우려해 경찰에 순찰 강화를 요청하고 학생들이 교복 대신 자율복을 입도록 조치했습니다. 충암고 학생회는 입장문을 통해 "비상계엄 선포는 대한민국을 혼란에 빠트린 잘못된 행위였다. 다만 재학생은 전혀 관련이 없으며 무고하다"며 학생을 향한 비난을 멈춰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주목할 건 충암고와 배재고 사태 모두 미성년자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분풀이와 따돌림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계엄을 일으킨 건 진작에 충암고를 졸업한 '대선배'들이고, 야구대회에서 부적절한 응원을 한 건 배재고 학생들 중 극히 일부인 야구부였습니다. 하지만 분노는 애먼 학생들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우선 교육계에서는 사태의 원인과 무관한 학생들을 향한 분노 표출을 자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학생학부모교사인권보호연대 관계자는 "고인을 위로하기 위한 화환을 학교에 설치한 행위는 학생들이 받을 고통을 일절 고려하지 않은 시각적 테러다. 좌우 정치 이념을 떠나 이런 걸 본 학생들은 아무것도 배울 수 없고, 어른들을 향한 분노를 갖고 자라날 수밖에 없다"며 "이무것도 할 수 없고 힘없는 미성년자들에게 아동학대를 한 셈"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런 방식의 분노 표출을 용인할 경우 제2의 배재고 사건을 유발할 수도 있다고 경고합니다. 분노 표출의 대상만 바꿔서 힘 없는 약자 집단을 향한 좌표 찍기가 무방비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관계자는 "지역 폄훼 발언 등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공격만 한다면 분노 바이러스의 전염만 반복될 것이다. 결국 학생들처럼 힘없는 개개인을 집단으로 공격하는 일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며 "'어떻게 벌을 줄까'보다는 양극화된 사회를 해결하고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할지 등 해결책을 사회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박진석 기자 ptba12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