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대 독일 베를린의 한 카페. 손님이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가격은 5000마르크였다. 한 시간 뒤 계산서에는 8000마르크가 찍혀 있었다. 불과 한 시간 사이에 돈의 가치가 녹아내렸다. 극단적인 초인플레이션 사례다. 하지만 이 섬뜩한 원리는 지금 우리 곁에서도 조용히 작동 중이다.
오늘날의 화폐 증발은 느리고 은밀하다. 통장 속 숫자는 그대로다. 1억원은 여전히 1억원이다. 그러나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실물자산의 크기는 매일 줄어든다. 안정을 바라고 선택한 현금의 배신이다.
실제 몇 년 전만 해도 1만원이면 점심 한 끼가 충분했다. 그러나 이제는 1만원 아래 메뉴를 찾기 어렵다. 내 월급에는 문제가 없다. 매년 오르니까. 다만 월급보다 가격이 더 빠르게 올랐을 뿐이다. 돈의 숫자는 그대로인데 구매력은 달라졌다.
현금은 가격이 오르지 않는다. 1만원은 내일도 1만원이다. 10년 뒤에도 숫자는 1만원이다. 그렇다면 돈의 가치가 떨어질 때 무엇이 함께 달라질까. 바로 부채다. 빚은 흔히 위험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물론 과도한 부채는 위험하다. 상환능력을 넘어선 대출은 자산이 아니라 족쇄가 된다. 하지만 감당할 수 있는 범위의 부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플레이션이 이어지는 국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5억원을 연 4%에 빌렸다고 하자. 1년 이자는 2000만원이다. 숫자만 보면 적지 않은 돈이다. 그런데 물가가 매년 4%씩 오른다면 어떨까. 빌린 5억원의 명목가치는 그대로다. 하지만 그 돈의 실질적인 부담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든다. 더구나 소득과 자산 가격이 함께 상승한다면 효과는 더욱 커진다. 오늘의 5억원과 10년 뒤의 5억원은 같은 5억원이 아니다.
빚은 숫자로 남지만 돈의 가치는 변한다. 조금 과장하면 연 3~4%의 금리는 공짜나 다름없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인플레이션 시대의 부채가 갖는 아이러니다.
고도성장기에는 저축이 자산을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열심히 벌고 아끼면 돈이 쌓였다. 금리도 높았다. 예금만으로도 어느 정도 자산을 불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현금이 다른 자산의 상승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예컨대 서울은 주택 가격 상승률이 월급 상승률보다 높다. 월급을 모으는 속도보다 집값이 오르는 속도가 빠르면 현금만으로는 시장에 진입하기 어렵다. 시간이 갈수록 격차는 커진다. 처음에는 1억원 차이였지만, 몇 년 지나면 2억원이 차이 난다. 그다음에는 3억원으로 벌어진다. 우스갯소리로 집값이 떨어지는 것보다 무서운 게 집값이 다시 오를 때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무조건 빚을 내 부동산을 사라는 건 아니다. 현금 흐름과 부채 가치의 방향을 맞추는 게 좋다는 의미다. 현금을 갖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아니다. 단지 현금만 갖고 있지 말라는 얘기다. 인플레이션이 화폐의 구매력을 갉아먹는 시대. 자산관리의 핵심은 가치가 보존되거나 월급보다 빠르게 상승할 수 있는 자산을 찾는 데 있다.
김의중 금융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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