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솔지 휘슬러영화제 총괄 프로그래머 "용기 있는 이야기, 세상 밖으로 꺼내는 영화제"
윤솔지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총괄 프로그래와의 만남
전쟁·차별부터 인생 2막까지…영화제 문턱 낮추고 관객과 소통
"영화제 역할은 이야기 보여주는 것…그 이후 변화는 관객과 사회의 몫"
2026-10-22 16:08:00 ㅣ 2026-10-22 16:19:46
[뉴스토마토 신상민 기자]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를 고발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걸고 부당함에 맞서고, 누군가는 차마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습니다.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는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오기 어려웠던 이야기들에 스크린을 내어주는 영화제입니다. 거창한 변화를 약속하기보다 먼저 말할 용기를 낸 사람들의 목소리를 관객에게 전하는 것이 영화제가 추구하는 방향입니다.
 
윤솔지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총괄 프로그래머는 22일 <뉴스토마토>와의 인터뷰에서 영화제의 정체성을 설명하며 '용기'라는 단어를 강조했습니다. 그는 "우리는 그냥 용기 있는 작품을 선정한다"며 "내부고발뿐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이야기하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오는 23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리는 제3회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에는 약 260편이 출품됐습니다. 이 가운데 18개국, 46편이 최종 선정됐습니다. 지난해 26편에서 상영작이 크게 늘었고 상영관도 2개로 확대됐습니다. 전쟁과 폭력, 차별을 다룬 영화부터 가족과 노년,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영화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관객과 만납니다.
 
내부고발 넘어 내면의 목소리까지…선정 기준은 '이야기'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는 출범 초기 내부고발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했지만, 3회를 거치면서 그 범위를 넓혀왔습니다. 특정 조직이나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것뿐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감춰진 이야기를 꺼내는 과정도 영화제의 영역에 포함했습니다.
 
윤 총괄 프로그래머는 "영화적으로나 미장센적으로 완벽한 것을 찾은 게 아니라, 무엇이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가를 봤다"며 "원래는 내부고발로 시작했지만, 내부고발이라는 것이 한정적이지 않나. 자기 내면의 고발도 있고, 그런 이야기가 있는지가 관건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다만 사회적 메시지가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작품을 선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출품된 작품 대부분이 좋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완성도가 많이 떨어지는 경우에는 눈물을 흘리며 선정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이를 영화로 구현하는 완성도를 함께 고려했다는 설명입니다.
 
올해 선정작에서는 이란 영화 6편을 비롯해 팔레스타인과 아프가니스탄, 우크라이나 등 전쟁과 분쟁에 맞닿아 있는 지역의 작품들이 눈에 띕니다. 그러나 윤 총괄 프로그래머는 이들 작품을 단순히 전쟁영화라는 틀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이란 작품이 6편이라고 하면 전쟁을 다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며 "사실 전쟁 자체를 다루기보다 일상에 전쟁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이야기들이 많다"고 설명했습니다. 거대한 분쟁의 이면에 가려진 평범한 사람들의 삶 역시 영화가 들여다봐야 할 중요한 이야기라는 겁니다.
 
이러한 시선은 개막작과 폐막작에서도 드러납니다. 개막작 <레인보우스 테일>은 이란의 아이들 7명이 겪는 폭력과 유년기의 트라우마를 다룬 옴니버스 영화입니다. 윤 총괄 프로그래머는 "아동학대라는 어려운 주제를 굉장히 코믹하게 풀다가 반전을 보여준다"며 "완성도도 굉장히 높은 작품"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특히 여성에 대한 차별과 아동학대 등 이란 사회의 문제들이 일상적인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폐막작 <아우어 컬러스 네버 페이드>는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 성소수자 군인과 시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윤 총괄 프로그래머는 이 작품을 선정한 이유로 '절실함'을 꼽았습니다.
 
그는 "폐막작은 절실함이 처음부터 끝까지 느껴졌다"며 "우크라이나 안에서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알려야 한다는 절실함이 촬영부터 깊이 담겨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아이들의 이야기로 시작해 성소수자의 이야기로 끝나는 구성을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작품 자체가 가진 힘과 완성도가 선택의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포스터. (사진=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고발'에만 머물지 않는 영화제…"인생의 희로애락 담는다"
 
올해 영화제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저널리즘'과 '인생 2막'이라는 두 특별 섹션입니다. 저널리즘 섹션이 영화제의 사회 고발적 성격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면, 인생 2막은 기존의 휘슬러영화라는 개념과 다소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윤 총괄 프로그래머는 인생 2막 역시 넓은 의미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이야기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동시에 사회적 고발이라는 틀에만 영화제를 가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밝혔습니다.
 
그는 "고발이나 무시무시한 용기를 갖는 것으로만 한정하면 영화제가 재미없다고 본다"며 "영화라는 것은 인생의 희로애락이 다 들어가야 한다. 가족들도 함께 와서 즐겁게 볼 수 있어야 하고, 어렵게 공부해야 하는 영화제는 절대 아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인생 2막 섹션에서는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 시니어 프리스비팀의 도전을 담은 <체이싱 플라스틱>과 뒤늦게 엔카 가수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일본 주부의 이야기를 그린 <엔카, 길이 시작된다>가 상영됩니다.
 
윤 총괄 프로그래머는 두 작품이 새로운 꿈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관객들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영화제라는 공간이 사회문제를 무겁게 받아들이는 자리인 동시에 일상의 기쁨과 희망을 나누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특별 섹션의 운영 방향도 구분했습니다. 지난해 내란 관련 특별 섹션과 올해 인생 2막처럼 당대의 문제의식이나 출품작의 특성에 따라 마련하는 기획은 유동적으로 운영하되, 저널리즘 섹션은 지속할 필요가 있다고 봤습니다.
 
그는 "저널리즘 섹션은 계속해서 가져가야 할 것 같다"며 "그것은 저의 정체성이기도 하고 영화제의 정체성이기도 하다"고 말했습니다.
 
영화제를 어렵게 느끼는 관객들의 인식도 바꾸고 싶어 했습니다. 윤 총괄 프로그래머는 "영화제라고 하면 영화를 아는 사람들이 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있지만, 휘슬러영화제는 그냥 영화를 좋아하는 시민들이 와서 즐겁게 보면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외형적 성장보다 '관객과의 만남'이 중요
 
올해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는 지난해보다 상영작이 크게 늘어나면서, 역대 최대 규모로 개최됩니다. 하지만 윤 총괄 프로그래머는 영화제의 규모를 키우는 것 자체가 목표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는 "외연을 확장하려고 작품을 많이 뽑은 것이 아니다"라며 "상영해야 할 작품들이 있었고 극장 계약은 나중에 이뤄졌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내년에는 20편만 상영할 수도 있고, 그다음 해에는 200편을 상영할 수도 있다"며 "그렇게 유연하게 가는 게 더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상영작 수와 상영관 규모를 영화제의 성과로만 평가하기보다 좋은 작품을 관객에게 선보이는 본래 목적에 집중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관객과 감독이 직접 만나는 관객과의 대화(GV)도 영화제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올해는 여러 나라의 해외 감독들이 직접 방한해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눌 예정입니다.
 
윤 총괄 프로그래머는 그동안 영화제에서 경험한 관객과 감독의 만남을 '따뜻한 교류'로 기억했습니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다루는 만큼 날카로운 논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관객들이 감독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작품 이후의 상황을 궁금해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난해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다룬 작품의 상영 당시 감독과 관련 당사자들이 서로를 끌어안았던 장면을 떠올리며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영화제에 참여하는 해외 감독들과의 교류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넉넉하지 않은 예산 탓에 충분한 숙박이나 편의를 제공하지 못하지만, 감독들과 심사위원, 관계자들이 격의 없이 어울리는 경험이 영화제에 대한 좋은 평가로 이어지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영화제의 또 다른 고민은 상영 이후의 유통입니다. 윤 총괄 프로그래머는 독립영화와 단편영화가 관객을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단편 섹션은 거의 다 매진되더라. 그만큼 볼 기회가 없기 때문"이라며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는 왜 단편영화를 볼 수 없는지, 오히려 잘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따라 영화제 측은 IPTV 등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 단편영화의 유통 기회를 확대하는 방안에도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단순히 사흘간 영화를 상영하는 행사를 넘어 작품이 더 많은 관객에게 도달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역할이 필요하다는 판단입니다.
 
재정적 자립 역시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는 대규모 지방자치단체 예산 지원보다, 시민 후원과 공공기관·기업·단체 등의 협찬을 바탕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영화제가 성장하면서 운영에 필요한 인력과 비용 부담도 커지고 있습니다.
 
윤 총괄 프로그래머는 기존의 지원 방식에만 기대지 않고 새로운 운영 모델을 찾아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는 "영화제를 통해 1년 동안 지역 상영회를 한다든지 배급을 한다든지, 파생되는 사업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며 "한국 영화제라는 기존의 틀에서 조금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영화제를 반드시 대형 상영관이나 화려한 행사로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해외의 작은 영화제가 오랜 기간 마을의 다양한 공간에서 상영을 이어온 사례를 소개하며 "돈이 하나도 없다면 한강변에서 프로젝트를 틀고도 계속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난해 열린 제2회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모습. (사진=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용기 있는 이야기를 꺼내 보여주는 것"이 우리 역할
 
윤 총괄 프로그래머가 생각하는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의 궁극적 역할은 명확합니다.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내세우기보다, 누군가 어렵게 꺼낸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도록 관객 앞에 놓아주는 것입니다.
 
그는 영화제가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길 바라느냐는 질문에 "고발 이후에 사회가 변한다는 식으로 거창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며 "어떤 변화를 가져오겠다는 것 또한 관객이나 사회의 역할이지 우리가 의도한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관객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판단을 내릴지도 영화제가 미리 정할 수 없다고 봤습니다. 윤 총괄 프로그래머는 관객들이 충분히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 무엇이 어떤 것인지 본인들이 다 알 것"이라며 관객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드러냈습니다.
 
결국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가 지향하는 것은 관객에게 정해진 답을 제시하는 일이 아닙니다. 침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내고, 그 이야기를 마주한 관객이 스스로 질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역할은 용기 있는 이야기를 그냥 꺼내 보여주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해요."
 
윤 총괄 프로그래머의 말처럼 영화제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다만 누군가 용기를 내 시작한 이야기를 관객에게 건넵니다. 그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후 어떤 변화를 만들어갈지는 영화를 본 관객과 사회의 몫으로 남겨둡니다.
 
윤솔지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총괄 프로그래머. (사진=본인 제공)
 
신상민 기자 lmez0810@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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