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인간으로 산다는 건 인간이 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이 되기 위해 숙명의 실을 끊은 꼭두각시 피노키오의 노래가 22일 잠실의 심장을 고동치게 했습니다.
지휘자 안두현이 이끄는 아르츠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이날 롯데콘서트홀에서
네오위즈(095660) 'P의 거짓 오케스트라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객석에는 게임 'P의 거짓'에 울고 웃었던 '크라트 시민' 약 1000명이 자리했습니다. 두 시간 남짓의 공연 동안 이들은 제페토의 인형 피노키오(P)가 인간성을 얻어 소년으로 거듭난 과정을 서른다섯 곡으로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22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P의 거짓 오케스트라 콘서트'에서 크라트의 경찰 로봇 '버려진 파수꾼'의 주제곡 '비탄의 심판(Judgement of Mourning)'이 합주되고 있다. 두 번째 보스인 버려진 파수꾼의 이름은 '머피'이며, 크라트의 아이들을 사랑했다. 머피의 사연은 2회차 때 자세히 알 수 있다. (사진=네오위즈)
대조된 주법, 게임 서사 닮아
'P의 거짓'의 배경은 첨단 기술로 번영했다가 생지옥이 된 도시 크라트입니다. 이곳에서 P는 자동인형 폭주와 온몸이 굳는 화석병 창궐의 원흉을 쫓으며 인간성을 얻어갑니다. P가 인간성을 얻는 수단은 다름 아닌 P의 특기인 거짓말입니다. 게임 속에서 P는 화석병에 걸려 앞 못 보는 여인에게, 그녀가 안은 인형이 '귀여운 아기'라고 답하면서 첫 음반 아이템 'Feel'을 받게 되는데요. 이날 오케스트라는 선의의 거짓말을 선택한 대가로 애달픈 노래를 들었던 관객을 위해, 이 곡을 공연의 첫 순서로 택했습니다. 이때부터 관객들은 게임 속 공연장인 에스텔라 오페라 극장에 온 크라트 시민이 돼, 피노키오의 성장기를 회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 세상은 낭만으로만 채워져 있지 않습니다. 때때로 투쟁도 필요하죠. 두 번째 곡 '끔찍한 행진(Dreadful March)'에선 스물한 개의 바이올린 활이 인형 줄처럼 위아래로 출렁이는 모습이 연출됐는데요. 이 광경은 게이머 관객들로 하여금 꼭두각시 피노키오를 긴박하게 조종해야 했던 첫 난관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그 오른편에선 비올라·첼로·더블베이스가 가로선을 연신 긋고 있었는데, 마치 숙명의 실을 끊으려는 P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관객들이 'P의 거짓 오케스트라 콘서트' 1부 직후 프로그램북을 사기 위해 줄 서고 있다. (사진=이범종 기자)
이후에도 안두현의 지휘봉은 적의 급소를 노리듯 쉴 새 없이 치고 빠지며, 관객들을 치열했던 보스전의 현장으로 데려갔습니다.
고상지의 반도네온 연주는 한때 번성했던 '로사 이사벨 거리(Rosa Isabelle Street)'의 쓸쓸함과 허망함을 노래했습니다. 뒤이어 P에게 숨을 넣어준 푸른 요정 소피아의 슬픈 사연('Arche Abbey Upper Part')까지 더해지면서, P가 어느새 선택과 후회로 얼룩진 인간을 닮아가고 있음을 확인시켰습니다. 고된 삶을 감내하고 있는 P를 잠시나마 위로하는 듯한 곡도 들을 수 있었는데요. P를 제페토 아들 카를로의 복제품이 아닌, '특별한 아이'로 대해준 안토니아의 장송곡 '해변의 기억(Memory of Beach)'이었습니다. 쉽지 않은 지난 여정 속 인간에 대한 실망이 제법 컸을 텐데도, 그녀가 가르쳐준 '따스함'은 P가 끝끝내 사람이 되기로 한 이유 중 하나로 남았습니다.
아르츠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공연을 마치고 인사하고 있다. (사진=이범종 기자)
마침내 P는 누군가의 인형이 아닌, 진짜 인간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아들 카를로를 되살리기 위해, 그의 정수 '에르고'가 담긴 심장을 달라는 제페토의 손을 뿌리친 겁니다. 이에 제페토가 꺼낸 '이름 없는 인형'과의 마지막 사투가 시작되는데요. 이때 흐른 곡 '이름없는 혼돈(Nameless Chaos)'은 제페토의 손에 감겨 삐걱대는 꼭두각시의 실, 그 자체처럼 보였습니다. 바이올린 주자들의 활이 인형의 실처럼 수직으로 뻗으며 소름을 돋울 때, 비올라·첼로·더블베이스 연주자들은 손바닥으로 악기 목을 두드리며 공허하고 둔탁한 내면을 반영했습니다.
이는 공연 초반 P가 숙명의 줄을 끊듯 연주한 '끔찍한 행진' 때의 주법과 대비됐습니다. 끔찍한 행진은 꼭두각시 P를 조종하면서도 그가 인간이 되길 바란 게이머의 심정을 대변했다면, 이름 없는 혼돈은 인형을 단순한 도구 취급하는 제페토의 본심을 부각합니다. P의 거짓 오케스트라 공연은 이렇게 연주자의 모습에도 서사적 의미를 담아내며 몰입감을 더했습니다.
공연의 정점은 최지원 감독의 깜짝 등장이었습니다. 서른네 번째 곡 '고백, 꽃, 늑대 Part 1'이 끝나자, '원곡 가수' 최 감독이 장난스레 노래 한 소절을 부르며 영상 편지를 보냈는데요. 최 감독의 인사가 끝나자, 올여름 출시될 DLC 'P의 거짓: 서곡'의 미공개 주제곡이 울려퍼지며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윤진서 씨와 최한희 씨가 'P의 거짓' 배경인 벨 에포크 시대 느낌으로 일본식 부채 우치와를 만들어왔다. (사진=이범종 기자)
P의 관객 "심장이 고동쳤어요"
공연장 밖에선 아쉬움에 발길을 돌리지 못한 크라트 시민들이 남은 온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강릉에서 온 윤진서 씨와 서울 사는 최한희 씨는 이 작품의 배경인 벨 에포크 풍으로 일본식 부채 우치와를 만들어 오케스트라를 응원했습니다.
두 사람은 P의 거짓을 하다 친구가 됐다고 합니다. 윤씨와 최씨의 피노키오에 대한 사랑을 아는 지인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소개해 준 덕분인데요.
윤씨는 "둘 다 소피아와 피노키오의 감정선을 좋아한다"며 "항상 두 인물이 재회하는 결말을 얘기하곤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P의 거짓의 서사와 전투에 매료돼 몇 번이고 결말을 봤다고 했습니다. 이날 객석에 앉은 이유는 그 감동을 음악이 완성했기 때문인데요. 최씨는 "직접 오케스트라로 주제곡을 들을 거로 생각하니 심장이 고동쳤다"며 "로미오의 사연이 담긴 '인형의 왕(King of Puppets)' 연주에 감동했는데, 작중 로미오가 P에게 보낸 메시지를 듣고 눈물 흘린 일이 기억났다"고 회상했습니다.
두 사람은 최 감독의 영상 편지와 DLC 수록곡 첫 공개로 작품과 팬에 대한 진심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P의 거짓 공연이 다시 열린다면 몇 번이고 다시 찾겠다고도 했습니다.
여정을 마친 제페토의 인형이 크라트 호텔로 돌아와 피아노를 치고 있다. (이미지='P의 거짓' 실행 화면)
노원구에서 온 A씨는 봉제 인형 P를 데려와 함께 공연을 감상하며 지난 여정을 회상했습니다. P의 거짓을 PC로, 그것도 컨트롤러 없이 3회차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A씨는 "오늘 공개된 DLC 주제곡이 작품 분위기와 잘 어울려서 울 뻔했다"며 감회에 젖었습니다.
이밖에 아버지와 아들, 연인, 외국인 코스어 등이 객석에 저마다의 온기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게임 속 P는 온기를 느낀 다음 '심장이 고동치며' 인간으로 거듭납니다. 관객들은 DLC 'P의 거짓: 서곡'으로 다시 한번 심장이 고동칠 날을 기다리며 에스텔라 오페라 극장을 빠져나갔습니다.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나볏 테크지식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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