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식의 K-국방)김구 암살 진실 왜곡 거부하고 교체된 헌병 사령관
장흥 장군, "안두희의 우발적인 소행으로" 상부 조작 지시 거절
정치에 군대 동원 성격, 국회 프락치 사건 헌병대 수사도 반대
중국군 장교로 임시정부 적극 지원, <장흥 자서전> 출간
친일 정치군인 판치던 국군 초기, 독립지사의 기개를 읽는다
2025-07-29 06:00:00 2025-07-29 06:00:00
현대 국군 창설 뒤 서울 후암동 국방부 청사 앞에서 찍은 사진. 첫째 줄 왼쪽부터 신태영, 송호성, 채병덕, 신성모, 이범석, 이응준, 김홍일. 둘째 줄 왼쪽에서 여섯번째가 장흥이다. (사진=도서출판 한울엠플러스 제공)
 
2025년 1월14일 광복회가 『장흥 자서전: 전격 교체된 대한민국 초대 헌병 사령관』 출판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책의 해제를 맡은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가 기념 강연을 했고, 장흥 장군의 아들 장석위씨가 참여했죠. 필자는 언론인으로서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장흥(1903~1983)은 백범 김구가 암살당한 1949년 6월26일 국군 헌병사령관으로 재직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중국으로 망명해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헌병 장교로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죠. 노년에 광복회 부회장을 지냈습니다. 비중 있는 독립운동가인데 실은 저도 책을 접할 때까지 존재를 잘 몰랐습니다. 책을 읽고 우리 독립운동사와 국방 역사, 현대 정치사에서 장흥이 특별한 인물임을 알게 됐습니다. 
 
국군 창설 초기에 김홍일 장군(왼쪽)과 함께 찍은 장흥 장군(오른쪽) 사진. 김홍일은 중국군과 광복군에서 활동했고 한국전쟁 때 시흥지구방어사령관으로 전공을 세웠다. (사진=도서출판 한울엠플러스 제공)
 
첫째, 중국 항일 전선에서 몸을 던져 투쟁했습니다. 장흥은 1927년 8월 여운형의 추천으로 황포군관학교(중국군 사관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뒤 중국군 헌병 장교로 입대했습니다. 한인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해 단원들의 활동을 지원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꾸준히 도왔습니다. 그는 중국군 장교 신분을 활용해 독립운동가들의 신변을 보호했습니다. 1935년에는 지청천(나중에 광복군 총사령관이 됨)한테 요청을 받고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한 한인 청년 사관들에게 보급품을 지원해주었죠. 일본군에 끌려간 한인 병사를 탈출시켜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는 일도 도왔습니다. 1945년 8월 일제 패망 뒤에는 광복군 참모가 돼 주중 한인 교포들이 안전하게 귀국하도록 지원했습니다. 
 
둘째, 국군 헌병 사령관으로서 군을 정치에 동원하는 데 반대했습니다. 장흥은 귀국 뒤 이승만 정부에서 국군 헌병 사령관으로 기용됐습니다. 그때 신성모가 국방부 장관, 채병덕이 총참모장을 했습니다. 이승만정부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긴커녕 정반대로 친일 관료를 다수 기용했죠. 일제 경찰에 복무했던 사람들은 이승만정부 경찰로, 같은 출신 가운데 직위가 높고 나이가 많았던 사람은 헌병으로 대거 들어갔습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장흥을 헌병 사령관으로 발령하면서 전봉덕이란 인물을 부사령관으로 받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전봉덕은 일제 때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장까지 한 인물이었습니다. 
 
이승만정부는 1949년 5월부터 김약수 등 소장파 국회의원 13명을 '남로당 프락치'라는 혐의를 적용해 검거하고 수사합니다. 의원들한테 국가보안법을 적용했죠. 국회 프락치 사건이라고 보통 불렀는데요. 해당 의원들은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이승만정부가 최대 정적인 백범 김구의 지지자를 제거한 정치 사건이라고 역사가들은 대개 평가합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헌병사령부에 이 사건을 맡으라고 지시했는데요. 장흥은 지시를 거부했습니다. 만에 하나 무슨 혐의가 있다 하더라도 민간인인 국회의원을 헌병이 잡으러 다닐 수 없다고 맞섰죠. 장흥 사령관은 총참모장의 눈 밖에 났고 '식물 지휘관'이 됐습니다. 국회의원 체포와 수사를 부사령관 전봉덕이 주도했죠. 
 
2025년 1월1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장흥 장군 자서전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사진 앞줄 왼쪽 네번째부터 한홍구 교수, 아들 장석위씨, 이종찬 광복회장 등이다. (사진=광복회 제공)
 
셋째, 김구 암살 사건 뒤 진상을 왜곡하라는 지시를 거부했습니다. 1949년 6월26일 포병 소위 안두희가 김구를 암살했습니다. 안두희는 현장에서 붙잡혀 헌병사령부로 연행됐죠. 장흥 사령관이 뒤늦게 상황을 접하고 사령부로 복귀해 보니 안두희는 의무실에서 편안히 치료받고 있었습니다. 격분한 장흥은 안두희를 영창에 넣으라고 지시했습니다. 다음 날 국방부는 장흥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부사령관 전봉덕을 사령관으로 발령했죠. 안두희는 영창에서 의무실로 다시 옮겼죠. 김구 암살범을 감싸고 배후를 은폐하려는 음모 냄새가 잔뜩 풍겼습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장흥을 불러 "안두희가 우발적으로 개인 범행을 했다"고 기자회견을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김구 암살의 배후를 의심하는 여론이 들끓자 민심을 무마하려 한 거죠. 요구대로 한다면 어떤 보직이든 주겠다고 회유했죠. 장흥은 거부했습니다. 장흥은 한직을 전전하다가 1957년 육군 소장 계급으로 전역했습니다. 
 
장흥이 1983년에 세상을 떴는데 자서전이 왜 지금 나왔느냐고요? 자서전 원고는 생전에 작성했죠. 아들 장석위씨에 따르면 장흥은 행동은 단호하되 신중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명예도 소중하니, 김구 암살 관계인이 모두 사라진 다음에 책을 내라고 아버지가 당부했다고 합니다. 
 
 
장흥 자서전. (사진=예스24 갈무리)
 
장흥 자서전을 보면 일제 침략 시절에 망명한 우리 청년들이 중국군에 합류해 항일 전선에서 투쟁한 역사를 생생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항일 독립전쟁 역사는 국군의 뿌리이죠. 
 
1948년 정부 수립 뒤 현대 국군을 조직할 때 중국군과 광복군, 일본군과 만주군 등 다양한 출신자들이 참여했습니다. 이 가운데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 득세하고 독립군과 광복군 출신자는 힘을 잃었죠. 친일 청산이 미흡하기로는 국방 영역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의 단면과 문제점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2024년 12·3 계엄 내란에 가담한 일부 군인들이 "군인은 명령에 따를 뿐이다. 정당한 명령, 부당한 명령을 가릴 수 없다"고 항변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죠. 군인한테 군율이 중요하지만, 군인이 부당한 명령도 맹목적으로 따르는 군사 기계는 아닙니다. 장흥 장군은 독립운동가이자 애국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헌법과 민주주의를 지킨, 원조 참군인으로 기억할 만합니다. 
 
■필자 소개/박창식/언론인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광운대에서 언론학 석사와 박사를 했다. 한겨레신문 정치부장 논설위원을 지내고 국방부 국방홍보원장으로 일했다. 뉴스토마토 객원논설위원과 뉴스토마토 K국방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국방 생태계에서 소통을 증진하는 방법에 관심을 두고 있다. <국방 커뮤니케이션> <언론의 언어 왜곡>과 같은 책을 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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