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나의 알코올 일지⑤)나머진 너가 마셔, 나머지 돈도 너가 마셔
2025-11-07 06:00:00 2025-11-07 06:00:00
아주 정확하지는 않지만 2015~2018년 사이에 서울 서촌에서 카페 장사를 했다. 전업 평론가로 살다 살다 경제적으로 벼랑 끝에 몰렸을 때였다. 카페를 여느라 여기저기서 돈을 마련했다. 낮에는 본업에 종사하고 저녁에는 카페에 나가 맥주와 와인, 위스키를 팔았다. 물론 커피도 팔았다. 처음엔 사람들이 몰렸다. 영화 쪽 선후배들, 신문방송 쪽 동기들, 가깝게 지냈던 청와대 근무자들이 드나들었다. 저녁 ‘물장사’가 나쁘지 않았다. 드나드는 사람들 테이블을 오가며, 술을 팔기 위해 술을 마셨다. 
 
그때의 나는 마치 록키 시리즈 완결편에 해당하는 <록키 발보아>(2007)의 록키(실베스터 스탤론) 같았다. 영화에서 록키는 권투를 그만두고 꽤 세련된 레스토랑을 차린 뒤 테이블을 오가며 손님들에게 자신의 시합 이야기를 ‘팔며’ 지낸다. 손님들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좋아하며 기꺼이 술 한 잔, 또 한 잔을 사서 권하곤 한다. 나도 그렇게 내 술 카페 ‘반하다’의 테이블을 오가면서 영화 이야기를 팔았다. 록키와는 달리 (영화에서 록키는 권투선수 출신답게 술을 마시지 않는다) 나는 여기저기서 한 잔, 또 한 잔을 마셨다. 그때는 동부이촌동에서 월세를 살았고 집이 가까운 편이라 새벽 2시까지 영업한 날이 많았다. 서촌 일대는 곧 박근혜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시위 현장이 됐다. 내 카페 ‘반하다’는 시위의 마지노선이었다. 카페 영업에 큰 도움이 됐다. 혁명은 종종 돈이 된다. 
 
서울 서촌 카페 '반하다'는 박근혜 탄핵 집회의 마지노선에 위치해 영업이 '반짝' 잘되기도 했다. (일러스트=임진순) 
 
카페에서 내가 좋아하는 수제 맥주만 마셨어야 했다. 그러나 삶의 핑계는 늘 변화가 무쌍하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카페 건너편에는 순댓국집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맛이 일품이었다. 순댓국 사장은 새벽처럼 일어나 토렴을 하고 또 하는 모양이었다. 종종 그의 순댓국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어느 날부터 카페 알바생들이 술 취한 상태인 나를 찾아 순댓국집에 오곤 했다. 그렇게 마시기 시작한 소주는 매일같이 서촌 요기조기 술집을 돌아다니며, 한 병이 두 병이 되고 결국 세 병이 네 병이 됐다. 내 카페에서는 소주를 팔지 않았다. 소주를 마시고 카페에 돌아와 일할 때는 커피를 스트롱하게 만들어서 술을 가라앉히고 (냄새를 지우고) 일했다. 문을 닫고 집에 들어가서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차가운 소주를 맥주 컵에 가득 부어서 먹고 쓰러져 잤다. 알코올중독이… 아니라 소주 중독이 됐다. 
 
알코올 영화의 대명사 <라스베가스를 떠나며>(1995)에서 정작 기억에 남는 장면은 주인공 벤(니콜라스 케이지)이 허구한 날 술을 마시는 모습이 아니다. 할리우드 극작가인 벤은 술 때문에 글을 못 쓰게 된 것인지, 글이 안 써져서 술을 마시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여하튼 그는 알코올중독이 됐다. 그는 사는 걸 포기한다. 그래서 모든 걸 처분하고 불태운다. 그간 자신이 써온 시나리오를 태우던 그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술이 과하면 당연히 우울증이 심해지고 그것이 곧 죽음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벤이 술을 마시는 건 어쩌면 외로움 때문이었다. 조용필 노래의 가사처럼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게 만드는지' 나는 아는데 사람들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만 아는 고독은 늑대가 되어 나를 덮치기 마련이다. 창녀 세라(엘리자베스 슈)는 유일하게 벤과 고독을 나누눈 사이다. 그녀가 죽어가는 벤에게 유일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그 마지막 장면을 사람들은 잊지 못한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술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인간의 원천적 고독에 관한 얘기이며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 대한 영화다. 
 
영화 <리빙 라스베가스>의 주인공 벤(니콜라스 케이지)은 죽을 때까지 술을 마실 생각으로 라스베가스로 간다, (사진=성창필름)
 
한국을 종종 찾았던 감독 마이크 피기스와는 꽤 자주 만났고 또 술을 마셨다. 내 영화제 파트너 달시 파켓의 소개로 서울 충무로 고깃집(정작 이름은 ‘충무로 김치찜’이었다)에서 처음 만났다. 메뉴가 ‘소 한 마리’, ‘돼지 한 마리’ 이런 식으로 되어 있던,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질 좋은 고기를 다양한 부위로(꽃등심, 안심, 살치살, 채끝살 등) 즐길 수 있는 맛집이었다. 그렇게 싸게 팔더니 결국 문을 닫았다. 처음에는 뭐 이런 허름한 데를 오나 하던 마이크 피기스 옹(翁)은 한우를 한 점 먹더니 오잉, 하는 표정이 됐고 결국 ‘소 한 마리’ 메뉴를 두 번이나 시켜 먹었다. '소 한 마리'의 가격은 6만원대였다. 노친네가 고기를 밝히면 색을 밝힌다고 했던가. 내가 만난 마이크 피기스 감독은 천생이 음탕한 남자였다. 그가 <원 나잇 스탠드>같은 영화를 만든 동력이었을 것이다. 부산영화제는 3회 때인 1998년에 <원 나잇 스탠드>를 오픈 시네마로 상영했는데, 문제는 수영만에 마련된 야외 상영장에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 관객이 많았다는 거였다. 영화 곳곳에 나오는 섹스신을 보다 보다 못한 부보들은 아이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화를 버럭버럭 내면서 상영장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때의 아이들은 보다 건강한 진보주의자로 성장했을 것이다. 나는 마이크 피기스의 선한 영향력을 믿는다. 그래도 그는 음탕한 늙은이이며 술과 재즈와 여자를 좋아한다. 
 
마이크 피기스에게 “난 사실 당신의 데뷔작 <폭풍의 월요일>(Stormy Monday, 1988) 때문에 당신을 좋아하게 됐어”라고 말했었다. 마이크 피기스는 그 영화 얘기를 하는 사람을 한국에서 처음 만났다,며 소주잔을 부딪쳤고 그때의 나는 이미 소주를 버리고 맥주만 마시던 때였다. 그래도 기분이 좋아져서 맥주에 소주를 살짝 탔던 기억이 난다. 피기스와 나는 그날 꽤 많이 마셨고 얼큰하게 취했다. 달시 파켓이 같이 있었고, 요즘은 유튜브 출연으로 유명해진 평론가 윤성은이 있었다. 얼마 전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된 평론가 김효정도 있었고, 권소영이란 참으로 특이한 (지금은 전시 기획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다들 꽤 많이 마시고 먹었으며, 그날 술값은 내가 냈다. 젠장. 
 
마이크 피기스(가운데) 감독은 한국을 자주 찾았다. 달시 파켓(오른쪽, <기생충> 영어 번역자), 김효정(영화평론가) 등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사진=김효정 제공)
 
일명 네오 누아르 계열인 이 영화는 복잡하게 얽힌 갱단의 음모를 그렸다. 가수 스팅이 클럽 사장으로 나온다. 숀 빈과 토미 리 존스, 무엇보다 멜라니 그리피스의 리즈 시절 영화다. 40년 가까이 된 영화다. 젊은 시절의 자신을 투영시킨 숀 빈은 왜 그렇게 어둡고 우울했을까. 지금 보면 겉멋이 잔뜩 들어간 영화겠으나 젊은 날 영화광 시절의 나를 사로잡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쩌면 이 <폭풍의 월요일>은 박찬욱이 데뷔작 <달은…해가 꾸는 꿈>(1992)에서 살짝 그 톤 앤 매너를 가져왔을 수도 있겠다 싶다. 뭐 믿거나 말거나, 동의하거나 말거나다. 
 
하루에 다섯 병까지 마시던 소주의 추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소주를 마시지 않고 그 맛을 추앙하지도 않게 됐지만 같이 마셨던 사람들, 같이 나눴던 이야기들, 불현듯 부리나케 싸우고 논쟁했던 그 주제들에 대한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장사가 안 되고, 이런저런 돈벌이도 궁해지고, 더더욱 내 글을 받아주는 데도 별로 없을 때면 오래 알고 지내는 여자 선배가 카페에 찾아와주곤 했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그녀는 여기서 가장 비싼 맥주 줘,가 늘 첫 일성이었다. 그러면 스컬핀 IPA 계열의 ‘밸러스트포인트’를 가져다주곤 했는데 7도짜리 꽤 독한 맥주라 그녀는 반 이상을 마시진 못했다. 나머진 너가 마셔,라고 했다. 그리고 후다닥 일어나 5만원짜리 지폐를 내고 그것도 나머진 너가 마셔,라고 하면서 휭 카페를 떠났다. 사람들 오기 전에, 자리 모자라기 전에 간다며. 그러나 자리는 늘 남았다. 
 
영화 <툼스톤>의 주인공은 자신이 알코올중독자임을 고백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사진=인벤트 디)
 
카페 문을 닫고 새벽에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소주를 맥주 글라스에 3분의 2쯤 부어서 YTN을 틀어놓고(지금처럼 각종 정치 유튜브 채널이 그리 많지 않을 때였다) 그걸 두어 번에 나눠 마시고 나서는, 한 잔을 더 할까 어쩔까 망설이던 때가 기억이 난다. 범죄 스릴러 <툼스톤>(2014)에서 전직 형사 맷(리암 니슨)은 모든 사건을 해결한 뒤 어느 모임의 단상에 선다. 그는 입을 뗀다. “나는 알코올중독자입니다.” 그는 망설이던 끝에 금주 모임에 나간 터였다. 그 장면에서 리암 니슨의 표정은 참으로 처연했다. 그걸 보면서 왠지 눈물이 핑 돌았던 생각이 난다. 알코올중독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자신을 깨닫게 되면 그래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알코올은 즐길 수 있는 매개체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형사 맷이 될 것인가, 아니면 레스토랑 주인 록키처럼 즐겁게 지낼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모든 걸 포기하고 라스베가스로 떠난 벤이 될 것인가. 모든 건 나 자신에게 달린 법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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