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강대국 간 경쟁, 강대국 간 세력 다툼으로 바뀌었다"
(황방열의 한반도 나침반)트럼프행정부, 국가전략 최고문서 '국가안보전략' 공개
2025-12-09 06:00:00 2025-12-09 06:00:00
미국은 레이건 행정부 시절인 1987년에 처음 '국가안보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 NSS)을 발표했다. 백악관 주도로 미국의 안보 목표와 우선순위, 전략의 방향성을 천명하는 '대통령의 국가전략 최고 문서'다. 
 
올해 1월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5일 공개한 33쪽 분량의 NSS는 "(취임 이후) 불과 8개월 만에 이스라엘과 이란 등 격렬한 충돌 8건을 해결했다"는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자화자찬 인사말로 시작한다. 하지만 전체 내용은 '미국의 역할 축소' 기조가 뚜렷하다. "타국의 사정은 그들의 활동이 우리의 이익을 직접 위협할 때만 우리의 관심사가 된다"는 서론이 이를 웅변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뉴시스)
 
"미국의 안보·번영이 성립하려면 서반구 우위가 '선결 조건'"
 
"미국이 아틀라스처럼 전 세계 질서를 떠받치는 시대는 끝났다"면서 "미국은 세계의 모든 지역과 모든 문제에 동등하게 주의를 기울일 여유가 없다"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러면서 최우선으로 '서반구'를 강조했다. "미국의 안보와 반영이 가능하려면 서반구에서 미국의 확실한 우위가 선결 조건"이라고 했다.(The United States must be preeminent in the Western Hemisphere as a condition of our security and prosperity.) 
 
NSS는 지역 전략을 설명하는 순서에서도 서반구를 맨 앞에 놓고 '트럼프판 먼로 독트린'(The Trump Corollary to the Monroe Doctrine)이라는 제목을 붙이기까지 했다. 약 200년 전 나온 '먼로 독트린'(1823년)까지 소환하면서 "미주 대륙에서의 우월성을 회복하고 우리 국토와 이 지역 전역의 주요 지리적 접근성을 보호하기 위해 먼로 독트린을 재확인하고 시행하겠다"고 했다. 특히 "우리 서반구의 긴급한 위협, 특히 본 전략에서 명시한 임무에 대응하기 위해 전 세계 주둔 미군을 재조정하고 최근 수십 년 또는 수년간 미국 국가안보에 대한 상대적 중요성이 감소한 전장으로부터의 철수하겠다"고 했다. 
 
트럼프가 2기 취임 전후로 덴마크령 그린란드 매입과 파나마 운하 통제권 재확보 등을 시도하면서 미국 내에서는 이미 '돈로 독트린'이라는 진단이 나왔다.(관련기사: 트럼프의 '돈로독트린', 서반구는 폭풍 속으로 https://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1282355)
 
2차 세계대전 이래 유럽은 미국의 최대 동맹이다. 하지만 NSS는 '지역 전략' 서술 순서에서 유럽을 서반구와 아시아에 이어 세 번째로 다뤘고, 그 내용도 유럽인들로서는 처참한 수준이다. "유럽 대륙은 창의성과 근성을 약화시키는 국가적 및 초국가적 규제 등으로 인해 글로벌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90년 25%에서 현재 14%로 감소해왔다"며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쇠퇴는 문명 소멸(civilizational erasure)이라는 현실적이고 더 뚜렷한 전망에 가려져 있다"고 조롱했다.
 
NSS는 "유럽연합(EU)을 비롯한 초국가 기구들이 정적의 탄압을 위해 시민의 자유와 국가 주권을 훼손하고 표현의 자유를 검열하는 등 민주주의 주요 원리들을 짓밟고 있다"며 "미국 외교는 진정한 민주주의, 표현의 자유, 유럽 각국의 고유한 정체성과 역사를 당당히 기념하는 가치를 계속 옹호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애국적 유럽 정당들의 영향력 확대는 확실히 큰 낙관론을 불러일으킨다"고도 했다. 여기서 '애국적 유럽 정당들'은 JD 밴스 부통령, 스티브 배넌 등 트럼프 진영의 활동에 비춰볼 때 영국 개혁당, 프랑스 국민연합, 독일을 위한 대안 AfD, 이탈리아 살비니 그룹 등 유럽에서 '극우'로 불리는 세력이다.
 
또 "장기적으로 볼 때, 늦어도 수십 년 안에 특정 NATO 회원국들의 다수가 비유럽인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그들이 세계 속에서 자신들의 위치나 미국과의 동맹을 NATO 헌장에 서명한 국가들과 동일한 시각으로 바라볼지는 미지수"라고 했다. 무슬림 인구가 증가하는 유럽이 현재의 정체성을 유지하겠냐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4일 발표한 '국가안보전략' 문서 표지. (사진=백악관 홈페이지)
 
헤그세스도 "미국의 유토피아식 이상주의의 시대는 끝났다"
 
유럽은 당장 발끈했다. 유럽 언론을 대표하는 '르몽드'는 "유럽엔 '총구' 겨누고 적국엔 '관용', 대서양 동맹의 사실상 파경"(US national security strategy targets Europe and spares adversaries)이라고 진단했다. "이혼 도장은 이미 찍혔고, 이제 재산 분할 절차만 남은 셈", "러시아엔 침묵, 유럽엔 호통", "유럽의 장례식 조사", "'MAGA(미국 우선주의)'의 정치 선언문"이라고 했다.
 
적어도 반세기 동안 미국이 최우선시해온 '중동'에 대한 평가도 낮아졌다. "중동이 장기적 계획과 일상적 실행 모두에서 미국 외교정책을 지배하던 시대는 끝났다"는 거다. "에너지 공급원이 크게 다각화됐기 때문"이라는 게 큰 이유다. 석유의 중요성이 약해졌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초강대국 간 경쟁은 강대국 간 세력 다툼으로 바뀌었다"(Superpower competition has given way to great power jockeying)고 한다. 현재 미국, 중국, 유럽연합, 러시아가 19세기식 강대국 '세력권(sphere of influence) 정치'를 벌이고 있다는 인식이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 장관은 NSS 발표 직후인 6일 레이건 국방포럼에서 "미국의 유토피아식 이상주의의 시대는 끝났다"고 했다. 이 한마디가 33쪽 NSS를 요약하는 표현이라 할 만하다. "이제는 냉철한 현실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며 "냉전 이후 우리가 누려왔던 단극 체제는 끝났다"는 것이다.
 
미국 외교의 '구루'라는 고 헨리 키신저는 2018년에 "트럼프는 역사상 한 시대가 종언을 고할 때 등장해 그 시대의 가식을 벗겨내는 인물일 수 있다"고 했다. 2차 대전 이후, 가깝게는 냉전 이후 미국이 구축하고 주도해온 '자유주의 국제질서'라는 것이 막을 내리는 것일까.
 
황방열 통일외교 전문위원 bangyeoulhwang@gmail.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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