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송정은·신유미 기자]

지난달 서울에는 한파특보가 잇따라 발효되며 체감온도가 영하 15도를 밑도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모두 두꺼운 외투에 몸을 숨기고 실내로 발길을 재촉할 때, 누군가는 한파를 온몸으로 맞으며 거리와 골목,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었습니다. 지난 1월21일 <뉴스토마토> 취재진은 서울 강남구 청담동 일대에서 하루 270건 안팎의 물량을 소화하는 택배기사 서정일(58)씨와 하루를 함께했습니다.
몸은 덥고 손은 얼고…한파에도 쉬지 않는 배송
CJ대한통운 소속으로 28년째 현장을 지켜온 서씨의 하루는 해가 뜨기도 전 시작됐습니다. 그는 “새벽 공기가 그대로 스며드는 터미널에서 분류와 짐 싣기(상차) 작업이 이어진다”며 “난방이 충분하지 않아 가만히 있으면 더 춥고, 계속 움직여야 버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분류와 상차는 공식적으로 기사의 업무가 아니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기사 개인이 떠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정일 택배기사가 청담동 대로변에 택배차량을 주차시켜 놓고 물품 배송을 준비하는 모습. (사진=뉴스토마토)
오전이 되자 배송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청담동 일대 상업·업무 지구와 주택가, 언덕길이 뒤섞인 배송 구역에서 서씨는 시간당 35~40건의 물량을 처리했습니다. 주차 공간이 부족해 차량을 한 곳에 세워두고 끌차에 물량을 실어 골목과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눈이 덜 치워진 골목은 미끄러질 위험이 컸지만, 회사 차원의 방한·안전 장비는 없었습니다.
배송을 이어가는 동안 서씨의 몸에서는 땀이 났지만 손과 발, 얼굴은 한파에 그대로 노출됐습니다. 서씨는 "몸은 덥고 손은 얼고, 이 상태가 제일 힘듭니다"라고 했습니다. 정해진 휴식 시간은 없었습니다. 배송을 위해 차량을 세운 10분 동안 트럭 안에서 잠시 쉬는 게 전부였습니다. 점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점심을 먹으면 배송이 밀린다"며 "배고프면 편의점에서 간단히 먹고 다시 나간다"고 했습니다.
"'이동노동자 쉼터'가 뭔가요? 처음 듣는데요"
배송 일정에 쫓기는 구조에서는 잠시 쉬는 것 자체가 사치입니다. 배송을 멈추는 순간 곧바로 업무 지연과 수입 감소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는지 확인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기자가 서씨에게 서울시의 이동노동자 쉼터를 아는지, 이용한 적 있는지를 묻자 서 씨는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그런 게 있나요? 저는 처음 듣는데요."
서정일 기사가 끌차에 배송물품을 싣고 가는 모습. (사진=뉴스토마토)
취재팀은 이틀 뒤인 1월23일 서울시청 인근 '북창 이동노동자 쉼터'를 찾았습니다. 내부엔 휴식을 하는 대리운전 기사와 배달 노동자 10여명이 있었지만, 택배기사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쉼터에서 만난 한 지하철 택배 노동자는 "택배는 정해진 노선을 따라 움직이는데, 쉼터는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들르기 어렵다"며 "배송을 멈추고 이동하는 순간 손해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쉼터 운영 관계자도 비슷한 현실을 전했습니다. 그는 "쉼터 이용자 대부분은 대리운전이나 배달 기사"라며 "택배기사는 차량 이동과 시간 부담 때문에 이용 비율이 낮다"고 설명했습니다.
서울시가 직접 운영하는 '休(휴)이동노동자쉼터'는 △거점형(북창, 상암, 합정, 서초) △지하철 역사형(사당, 종각) △컨테이너형(가산, 구로) 등 총 8곳입니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거점형 이동노동자 쉼터 이용자는 총 7만6024명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대리운전(3만8940명, 51.2%), 퀵서비스(1만3504명, 17.8%) 등 두 유형 노동자들 이용빈도가 전체의 절반을 넘었습니다. 그런데 택배기사들의 이용빈도는 4.8%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택배노동자들이 더 특수한 상황에서 노동을 이어가기 때문입니다.
한선범 전국택배노동조합 정책국장은 "쉼터를 이용하려면 차량 이동과 머무는 시간을 합쳐 최소 1시간 이상이 걸린다"며 "건당 수수료 구조에서 휴식은 곧바로 수입 감소로 이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루 평균 물량을 기준으로 배송 건당 800원으로 잡았을 때 시간당 40건의 물량을 처리하는 것을 감안하면 쉼터를 이용하는 동안 포기해야 하는 수입은 약 3만원에 달합니다.
지난달 23일 북창이동노동자쉼터에서 휴식을 취하는 노동자들 모습. (사진=뉴스토마토)
한 국장은 "배송을 빨리 끝내고 귀가하는 것이 우선인 구조에서 중간 휴식은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며 "이용자가 적다 보니 홍보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말했습니다.
서울시도 이런 한계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서울시 노동정책과 관계자는 "배송 시간과 수입이 직접 연결된 택배 노동 구조에서는 쉼터 이용 자체가 쉽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동노동자쉼터를 관리하는 주체인 서울시노동권익센터 측 역시 "특히 택배노동은 배송 동선·주차 문제·수입 감소 부담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용률이 낮은 실정"이라고 했습니다.
'휴식은 개인선택'으로 남겨진 속도경쟁 구조
전문가들은 택배 노동의 문제를 개인의 체력이나 의지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난달 국회 토론회에서 "건당 수수료에 순수 노동 보상뿐 아니라 각종 비용과 위험 부담이 뒤섞여 있다"며 "이 구조에서는 노동시간 규율과 휴식 보장이 불가능하다"고 진단했습니다. 남희정 전국택배노동조합 CJ대한통운본부장도 "속도 경쟁이 다시 구조화되면서 휴식 박탈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서정일 기사가 청담동의 한 레스토랑에 물품을 배달한 후 확인용 사진촬영을 하는 모습. (사진=뉴스토마토)
서씨는 마지막 물품 배송을 마친 후 다시 터미널로 향했습니다. 터미널에서 마지막 분류작업까지 그가 근무한 시간은 약 11시간 정도였습니다. 그는 "오늘도 무사히 끝났네요"라고 말했지만, 손끝은 여전히 얼어 있었습니다. 쉼터는 존재하지만, 쉴 수 없는 구조 속에서 택배노동은 개인의 버팀으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쉬지 않아야 돌아가는 시스템'이 한파 속 택배 노동의 추운 현실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송정은 기자 johnnysong@etomato.com
신유미 기자 yumix@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