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종용·이재희 기자] 산업은행의 구조조정 실기 배경에는 '관치'가 있습니다. 정부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면서 산업 재편에 과감히 나서지 못하게 되고, 정책금융기관의 본연 기능과 관련 없는 국정 과제에 매달리면서 경쟁력은 쇠퇴했습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산은이 관치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구조조정 전문성과 조직 이해도를 갖춘 내부 출신으로 수장을 선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옵니다. 현재 국책은행 3곳 중 산은만이 유일하게 외부 출신 회장이 선임되고 있습니다.
산은, 매 정권 낙하산 인사
1일 금융권에 따르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금융 공기관을 중심으로 반복돼온 '낙하산 인사' 논란의 중심에는 산은이 있습니다. 산은 회장은 금융위원장이 임명 제청하면 대통령이 임면(임명과 해임)하는데요. 역대 산은 회장 대부분이 정권 핵심 인사들이 내려오는 자리였습니다.
이명박정부 시절 강만수 회장은 대통령 경제특보를 지낸 직후 산은금융지주 회장으로 내려왔고, 박근혜정부에서 산은을 이끈 홍기택 회장은 대선 캠프와 대통령직 인수위 출신으로 임명 당시부터 논란이 컸습니다. 문재인정부 이동걸 회장도 대선 캠프 비상경제대책단에 참여한 인사입니다. 윤석열정부 강석훈 회장 역시 대통령 인수위 경제특보 출신으로 캠프 인사가 수장을 맡는 패턴이 반복됐습니다.
그러면서 산은은 대통령실 하명에 휘둘리며 정책금융의 컨트롤타워 기능을 잃어버렸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산은 본점의 부산 이전이 있습니다. 지난 정부는 지역 균형 발전을 명분으로 산은 부산 이전을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강석훈 전 회장은 본점 부산 이전이라는 정치적 프로젝트를 밀어붙였고, 금융시장 논리와 실익은 완전히 무시됐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이 때문에 조직 내부에서 갈등을 반복하고 피로감이 누적되며 정책금융 본연의 기능이 마비되는 상황까지 이르렀습니다. 정책금융을 책임져온 중간 관리자급 실무형 간부들이 줄줄이 밀려났고, 직제상 전무이사 등기에 이름을 올린 수석 부행장도 본점 이전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업무에서 배제되기도 했습니다. 본점 이전 TF와 정치권 연계 인사들이 핵심 요직을 독식하면서 산업은행의 정책금융 전문성과 실무경험은 급격히 사라져갔습니다.
정권 핵심 인물이 낙하산으로 회장직에 내려왔을 때 가장 큰 문제점은 기업 구조조정에 대한 정부 요구를 거부하기 어려워진다는 점입니다. 과거 홍기택 전 회장은 산은의 대우조선해양 구조조정 실기 지적에 대해 해명하면서 이른바 '청와대 서별관회의'에서 결정한 것이라고 밝혀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당시 홍 전 회장은 "경제부총리와 경제수석, 금융위원장, 금융감독원장 등으로부터 정부의 결정 내용을 전달받았다"며 "당시 정부안에는 대우조선의 주채권은행인 산은 등이 얼마씩 돈을 부담해야 하는지도 다 정해져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구조조정 기업에 대한 무분별한 공적자금 지원과 혈세 낭비의 배경에는 정부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전문성 갖춘 내부 인사 등용 필요"
정권 교체 직후 낙하산 인사, 코드 인사 등 논란이 반복되면서 산은 경쟁력 저하뿐만 아니라 부실 구조조정으로 이어졌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전문가들은 △산업구조 전환 및 혁신금융에 대한 통찰력 △경제·금융 관련 현장 경험 및 전문성 △정치적 독립성 및 실행력 등 요건을 갖춘 인물이 산은 수장에 와야 한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산업 간 융합, 기술 투자, 공급망 재편에 있어 총체적인 시야를 가진 인물이 산은 수장으로 와야 한다"며 "정부와의 협업은 필수적이지만 민간 자본의 투자 논리와 정책금융의 균형을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책금융 실무에선 전문성과 독립적인 판단을 바탕으로 리스크를 감수하고 전략적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관행적으로 이뤄지던 금융 공기관 낙하산 임명을 막기 위한 제도화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민 세금을 기반으로 재정이 투입되는 정책금융기관 수장으로 오는 사람들이 관치 논란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선임 과정에서 절차적 투명성과 객관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부 입김이 가장 크게 작용하는 지대인 국책은행들이 내부 출신 수장을 배출하고 있지만 산은은 예외로 남아 있습니다. 국책은행 3곳 가운데 산은을 제외한 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은 모두 내부 출신 행장이 선임돼 조직을 이끌고 있습니다. 당초 관료 출신 인사가 하마평에 올랐지만 조직 이해도와 업무 능력을 고려해 내부 출신 인사로 선회했습니다. 김성태 기업은행장은 역대 다섯 번째 내부 출신 행장이며, 수출입은행의 윤희성 행장은 사상 첫 내부 출신입니다.
금융권 관계자는 "국책은행은 통상 정부 고위직으로 통하는 등용문이어서 기획재정부 등 정부 출신 관료나 대통령 선거 캠프에 참여했던 금융 전문가가 수장으로 가는 게 관례였다"고 전했습니다. 한 국책은행 관계자는 "내부출신 중 금융 전문성이 높고 오랜 기간 금융당국과 손발을 맞춰와 이미 정권의 방향성에 대한 교감이 충분한 인물들이 있다"며 내부 출신 등용을 촉구했습니다.
윤석열정부에서 산업은행 본점 부산 이전을 추진하면서 산은의 핵심 인력 이탈 등 부작용이 발생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 영등포구 산업은행 본점 로비에서 직원들이 산업은행의 지방 이전을 반대하는 피켓을 들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이종용 선임기자 yong@etomato.com
이재희 기자 nowhe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의중 금융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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