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윤영혜 기자] 중국발 공급 과잉과 수요 감소로 구조적 불황에 직면한 석유화학업계가 고사 직전에 몰렸습니다. 지난해부터 과잉 설비 축소와 통폐합을 핵심으로 하는 업계 주도 사업 재편이 거론된 바 있지만 그 이행이 지지부진하던 사이, 중국발 공급 과잉 여파가 국내 최대 규모 석유화학단지인 전라남도 여수부터 강타했습니다. 업계는 석화 기업들이 인수합병 등으로 설비를 효율화해 생산량을 줄이려고 해도 공정거래법상 규제가 걸림돌이라며 이를 한시적으로 완화하는 조처를 정부에 요구한 가운데, 정부가 발표할 석유화학 경쟁력 제고 후속 대책에 이목이 쏠리고 있습니다.
전남 여수산업단지. (사진=연합뉴스)
정부, 석화 경쟁력 후속책 발표
12일 업계에 따르면 정부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의 구체적 가이드라인이 빠르면 이달 말 발표될 예정입니다. 원래 올해 상반기 발표가 계획돼 있었지만 대선 정국으로 미뤄진 것입니다.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제고’는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 사항이기도 합니다. 이 대통령은 21대 대선 후보 당시 전남지역 공약으로 석유화학 산업 지원을 위해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친환경 전환 및 경쟁력 회복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역시 석유화학과 철강 등 위기산업에 대한 과감한 구조조정 의지를 밝혔습니다. 화학업계 관계자는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제고는 정권과 관계없이 추진될 것”이라며 “최근 석유화학 위기로 인한 어려움이 제일 큰 지역이 전남”이라고 했습니다.
석화업계사업 재편의 핵심은 과잉 설비 축소와 통폐합입니다. 과거 조선업계는 일감 부족과 수익성 난조로 공적 자금을 투입해 인수합병 등 구조조정 절차를 밟았지만, 이 정도의 고강도 구조조정까지는 원하지 않았던 당시 석화업계는, 정부가 개입해 구조조정을 하기보다 자율적인 체질 개선을 추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실제 화학산업협회가 보스턴컨설팅그룹(BCG)과 진행한 컨설팅 과정에서 기업 결합과 구조조정을 단행한 기업에 자금과 인력을 지원하는 등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방향이 논의됐지만, 기업 간 이해관계를 고려해 포함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대신 석화업계는 공정거래법 규제를 한시적으로 완화하는 등의 조치를 정부에 요구한 상태입니다. 석화 기업들이 인수합병 등으로 설비를 효율화해 생산량을 줄이려고 해도 공정거래법상 규제가 걸림돌이라는 입장입니다. 요구 사항에는 업계 애로 사항으로 꼽히는 산업용 전기요금 감면 등 비용 부담 완화 방안도 담겼습니다. 화학산업협회 관계자는 “기업마다 상황이 다르다 보니 정부가 물꼬를 터주는 역할 정도는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최근 들어 나오고 있다”며 “정부 부처 간 논의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습니다.
롯데케미칼 여수 공장. (사진=롯데케미칼)
이미 시작된 ‘셧다운 도미노’
정부 개입 대신 ‘사업 재편’으로 추진하겠다는 업계의 바람과 달리 사실상 구조조정은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전남 여수국가산업단지 내 여천NCC 3공장이 지난 8일부터 가동을 중단한 것입니다. 업계 관계자는 “IMF 당시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가 판을 깔아주고 할 것도 없이 어려운 곳들이 더 이상 못 버티니까 양을 조절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며 “우리끼리는 ‘질서 있는 퇴진’이라고 하지만 경쟁력이 없으니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맞춰가는 것 아니겠나”라고 전했습니다.
국내 석유화학업계는 2022년을 기점으로 중국발 공급 과잉에 수요 둔화, 탈탄소 압박 등까지 겹치며 복합적인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중국 정부는 2020년부터 석유화학 자급을 앞세워 대규모 설비 증설에 나섰습니다. 그 결과 중국의 에틸렌 생산 능력은 2020년 3227만톤(t)에서 지난해 5440만t으로 급등해 전 세계 증설 물량의 약 64%를 차지했습니다. 10여년 전만 해도 국내 석유화학업계 수출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던 대중국 수출은 2021년부터 감소세가 가팔라지며 2023년엔 36.3% 비중으로 떨어졌습니다.
국내 4대 석유화학 기업인 롯데케미칼·LG화학·한화솔루션·금호석유화학의 올해 상반기 합산 영업손실은 4762억원에 달합니다. 지난해 같은 기간 합산 영업 손실이 700억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7배 가까이 증가한 수치입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국내 석유화학 기업의 영업손익과 재무 상황을 고려했을 때 현재의 불황이 지속된다면 3년 뒤에는 기업의 절반만이 살아남을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실제 여수·대산·울산 등 전국 3대 석유화학단지에 입주한 NCC 10곳 중 상당수는 경영난에 직면해 있습니다. LG화학과 롯데케미칼이 몸집을 줄이기 시작한 이유입니다. LG화학은 대산·여수 공장의 석유화학 원료인 스티렌모노머(SM) 생산라인 가동을 중단했으며, 나주 공장 알코올 생산도 중단했습니다. 롯데케미칼도 작년 12월 여수산단 내 2공장의 일부 생산라인을 멈춰 세웠습니다. 롯데케미칼은 HD현대오일뱅크와 함께 대산석유화학단지 내 나프타분해시설(NCC) 설비를 통합 운영하는 방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화학업계 관계자는 “에틸렌 등 범용 제품의 공급 과잉이 실적 악화의 원인인 만큼 알아서 정리되는 모양새”라며 “NCC만 갖고 있어서 계속 돌릴수록 적자를 보는 대한유화나 NCC사업에 뛰어든 정유사들, 범용 제품의 비중이 높은 롯데케미칼은 구조조정의 압박이 높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윤영혜 기자 yyh@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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