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 흑색종 세포 모습. (사진=NIH)
[뉴스토마토 임삼진 객원기자] 최근 <네이처(Nature)>에 게재된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종양을 둘러싼 기계적 환경이 암세포의 행동 변화를 유발해 급속한 성장에서 더 침습적이고 약물 내성이 강한 상태로의 전환을 촉발할 수 있다고 밝혀졌습니다.
일반적으로 암세포는 유전적 돌연변이에 의해서 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종양을 둘러싼 물리적 압력이 암세포를 근본적으로 다른 상태로 전환시킬 수 있음이 확인됐습니다. 빠른 분열을 통해 덩어리를 키우던 세포가 외부 압박을 받으면 침습적이고 약물 저항성이 강한 형태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메모리얼 슬로언 케터링 암센터의 미란다 헌터(Miranda Hunter) 박사와 영국 옥스퍼드 루드비히 암연구소의 리처드 화이트(Richard White) 교수가 이끄는 국제 공동 연구팀은 흑색종(피부암) 제브라피시 모델을 이용해 이 과정을 규명했습니다. 연구팀은 "종양 미세환경에서 발생하는 물리적 힘이 암세포의 운명을 결정짓는 보이지 않는 방아쇠(트리거)"라고 강조했습니다. 연구진에 의하면 종양 세포가 주변 조직에 의해 꽉 조여질 때 구조적 및 기능적 변화를 겪는다는 것입니다. 세포들은 계속해서 빠르게 분열하기보다는 '신경 세포 침습' 프로그램을 활성화해 주변 조직으로 이동하고 퍼져 나갈 수 있게 됩니다.
DNA '굽히는 단백질' HMGB2의 역할
이러한 변형의 중심에는 DNA를 휘게 하는 단백질인 HMGB2가 있다는 것을 연구진은 밝혀냈습니다. HMGB2가 제한된 공간의 기계적 스트레스에 반응, 염색질에 결합해 유전 물질이 포장되는 방식, 즉 DNA 패키징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이때 침습성과 관련된 유전자 영역이 노출되며, 세포는 분열을 멈추고 '신경세포 침습 프로그램(neuronal invasion program)'을 가동합니다.
이 과정에서 세포는 내부 골격을 재편해 핵 주위를 철창(cage)처럼 둘러싸게 됩니다. 이 구조물은 LINC 복합체라 불리는 분자 다리와 연결돼 핵막을 보호하고, 세포가 빽빽한 조직을 뚫고 이동할 때 발생할 수 있는 핵 파열과 DNA 손상을 막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세포는 성장 속도는 느려지지만, 대신 약물 치료에 강하고 전이 능력이 뛰어난 상태로 바뀝니다.
화이트 교수는 "암세포는 주변 환경의 신호에 따라 빠르게 상태를 바꿀 수 있다. 우리가 보여준 것은 이 전환이 단순한 화학 신호가 아니라, 종양 내부의 기계적 힘에 의해 촉발된다는 사실이다"면서 "이 점은 기존 항암제가 놓치고 있는 가장 까다로운 암세포 집단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치료의 새로운 과제…물리적 신호 겨냥해야
이번 연구는 종양 미세환경(Tumour Microenvironment, TME)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암의 성격을 규정하는 적극적 요인임을 입증했습니다. 전통적으로 표적 치료제나 화학요법은 빠르게 분열하는 세포를 주 공격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물리적 압박을 받은 세포들은 이미 침습·저항성 상태로 전환돼 있어 기존 치료가 잘 듣지 않습니다.
따라서 연구팀은 향후 치료 전략이 단순히 DNA 변이나 분자 신호를 겨냥하는 것을 넘어, 물리적 환경과 세포 구조적 반응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HMGB2나 LINC 복합체를 겨냥하는 치료법이 그 단초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암 전문의들은 이번 연구 결과를 "임상 현장에서 흔히 목격되는 약물 저항성 전이암의 비밀을 풀 중요한 단서"라고 평가합니다. 암 환자 치료에서 수술·항암·방사선 치료와 함께 암세포의 물리적 환경을 조절하는 치료 패러다임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항암제 개발뿐 아니라, 종양 환경을 물리적으로 바꾸는 치료법 연구가 확장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암세포의 유연성(plasticity)이 내부 돌연변이만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압력이라는 물리적 힘이 암의 침습성 스위치를 켜는 숨은 조절자라는 것을 밝힌 논문(Mechanical confinement governs phenotypic plasticity in melanoma)은 지난달 27일 <네이처>에 게재됐습니다. 이 연구는 암 치료가 단순한 유전자 차원의 접근을 넘어, 물리적 환경까지 포함한 총체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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