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리한 산재 판정)(단독)①의사 한마디에 '산재 판결' 갈린다
산재소송서 판사가 '의사 소견' 근거 우선…'패소 판결' 줄지어
산재보험법 취지 위배…대법 "엄격한 의학적 증명 필요없다"
법조계 “의사 소견보다 업무상 질병 '규범적 판단' 우선해야”
2025-09-10 06:00:00 2025-09-10 06:00:00
[뉴스토마토 강석영 기자] 산업재해 소송은 일하다 질병을 얻은 노동자를 구제하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규범적 판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선 법관이 의사의 의학적 판단에만 기대 판결하는 게 대다수입니다. 의사 소견을 묻는 진료기록 감정(鑑定)은 소송의 필수 절차가 됐습니다. 이러는 과정에서 산재 소송은 노동자를 구제하는 절차보다 질병의 의학적 원인을 따지는 자리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소송은 지연되고, 노동자는 비용 부담까지 짊어져야 합니다. 감정 결과가 부실하거나 편향적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뉴스토마토>는 산재 전문 변호사와 의사, 법관 등을 만나 산재 소송이 산재보험 제도 취지에 맞게 운영되기 위한 개선점을 모색했습니다. (편집자 주)
 
25년 차 버스기사였던 김상호(가명)씨는 지난 2021년 퇴근하던 중 신체 오른쪽이 마비됐습니다. 뇌경색이었습니다. 김씨는 꾸준히 치료받았지만 3개월 뒤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습니다. 향년 59세였습니다. 김씨의 유족은 고인이 과로사를 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근로복지공단(이하 공단)에 산재를 신청했습니다. 김씨가 뇌경색 증상을 보이기 전 ‘일주일간의 업무시간’이 그 이전 12주 동안 평균 업무시간에 비해서 50% 가까이 늘었기 때문입니다. 
 
김씨는 고용노동부 고시상 ‘단기과로’에 해당합니다. 고인은 고정 근무자를 보조해 근무시간과 노선이 수시로 바뀌었고, 2교대제로 새벽·심야 운전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단은 김씨가 개인적 질환 때문에 사망했다고 판정했습니다. 10년간 앓은 심장질환 이력을 문제로 삼은 겁니다. 유족은 결국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산재 소송, 근거 없는 의사 소견 ‘받아쓰기 판결’
 
질병과 업무 사이 인과관계를 판단하는 주체에 따라 판결이 엇갈렸습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재판장 박정대)는 지난해 7월 유족 패소로 판결, 공단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재판부는 김씨의 진료기록을 감정한 의사 소견을 주요 근거로 들었습니다. 감정은 법관의 판단 능력을 보충하기 위해 전문가의 판단을 구하는 증거조사 절차입니다. 당시 사건에서 감정의(鑑定醫)는 김씨의 기저질환이 심근경색의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김씨의 주치의는 고인이 앓던 질환은 위중하지 않았고 평소에도 약을 먹으며 병을 관리했다는 의견을 냈지만, 감정의는 이를 부인했고 그 근거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감정의는 공단도 인정했던 단기과로 역시 부정하며 “업무 부담의 (사망) 기여도가 크지 않다”고 했습니다. 김씨 경력으로 볼 때 몸이 단기과로에 적응됐을 것이라고 추정하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재판부가 공단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린 건 감정의 소견을 그대로 인용한 결과였습니다. 김씨의 업무 환경에 대한 심층적인 고려도 뒤로 밀려났습니다. 고인의 사건에 대한 행정법원의 판결문에서 ‘예측이 어려운 업무와 교대제 등’ 업무 부담 가중 요인에 대한 판단은 없었습니다. 
 
지난해 6월 서울교통공사노동조합 주체로 서울 중구 시청 앞에서 열린 '산재 사망 책임 회피 규탄! 서울시·공사의 사과, 재발 방지 촉구!' 기자회견 모습. (사진=뉴시스)
 
반면 서울고법 행정8-2부(재판장 조진구)는 지난 6월 행정법원의 판단을 뒤집고 유족 승소로 판결했습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김씨의 업무 부담 가중 요인을 구체적으로 짚었습니다. 1심은 단기과로에 의한 정신적 스트레스는 근거가 없다고 했지만, 고법에선 기존 버스기사 업무 환경에 대한 판례를 근거로 인정됐습니다. 
 
재판부는 특히 산재소송에선 법관이 ‘업무 관련성 판단 주체’라고 강조했습니다. 재판부는 “김씨가 업무로 인해 과로했는지는 법원이 법적·규범적 판단을 거쳐야 할 사안”이라며 “감정의 소견은 의학적 관점에서 증거가 부족하다는 취지인 바, 업무상 재해 여부 판단에서 인과관계는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해야 하는 건 아니다”고 했습니다. 재판부는 또 의사 소견이 추정에 불과하고 사실관계도 부정확하다고 했습니다. 
 
김씨를 대리한 임채후 변호사는 “재판 절차는 의학이나 자연과학적 인과관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법관에 의한 규범적 판단을 받는 절차”라며 “법원이 감정의의 의학적 판단과 함께 제도의 취지, 노동환경 등 규범적 요소를 함께 고려하여 판단한다면 근로자의 정당한 권리가 보다 잘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소송서 감정의 소견과 반대되는 판결은 1%”
 
산재 전문 변호사들은 김씨 사건처럼 산재 소송에선 감정의 판단 그대로 판결이 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주장했습니다. 15년가량 산재 사건을 담당한 한 변호사는 “감정의의 소견과 반대되는 판결을 거의 못 봤다”며 “(산재 소송을) 수백 건 했는데 (감정의 소견과 다른 판결은) 1건 정도다. 체감상 99% 이상”이라고 했습니다. 
 
산재 전문 법무법인의 한 변호사는 “법관 인사이동이 많은 3~4월엔 특히 감정의 판단에 기대는 판결이 많다. 산재 사건을 처음 맡은 법관은 제대로 된 판단 기준이 없기 때문”이라며 “감정의 소견이 나오면 그것만 보고선 판결을 하는 대신 ‘공단과 합의를 보라’는 식으로 조정을 해 소송을 끝내는 판사도 다수”라고 했습니다. 
 
대법원 정의의 여신상. (사진=뉴시스)
 
그러나 이는 산재보험 제도의 취지와 대법원 판례에도 반합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업무상 질병의 핵심 판정 기준은 업무와 질병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는지 여부입니다. 대법원은 “인과관계의 입증 정도에 관해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입증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제반 사정을 고려할 때 업무와 재해 사이에 상당 인과관계가 있다고 ‘추단’되는 경우에도 그 입증이 있다고 할 것”이라고 판시한 바 있습니다. 
 
산재보험 제도의 운영 목적에 맞게 여러 사정을 검토해 규범적 판단을 내리라는 취지입니다. 업무상 질병 판정이 의학적 지식과 모순돼선 안 되지만, 의학적으로 원인을 엄격하게 증명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업무상 질병 판정의 목적은 의학적 원인을 밝히는 게 아니라 재해자를 산재보험으로 구제할 것인지 결정하는 데 있기 때문에 이런 판단이 나왔습니다. 자칫 소송의 주객이 바뀔 수 있음을 의식한 걸로 풀이됩니다. 
 
법조계 “의학 판단보다 규범적 판단 우선해야
 
산재소송에서 의사에게 질병과 업무 사이 인과관계를 묻는 건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의사 한 명이 질병과 사람의 몸의 모든 일에 대해서 다 알 수 없다는 겁니다. 한 산재 전문 변호사는 “임상의는 진단과 치료가 중점이라 질병의 원인을 모른다. 폐암 수술 명의도 폐암의 직업적 원인을 모른다”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법조계에선 산재의 직업적 원인은 의사도 모르는 분야라고 입을 모읍니다. 임자운 법률사무소 지담 변호사는 “진료기록에 작업 환경에 대한 정보는 나타나지 않는다”며 “결국 실증적 자료와 상병의 직업적·환경적 원인에 대한 연구 결과들을 토대로 업무 관련성 판단이 이뤄져야 한다. 실증적 자료가 존재하지 않은 사건 혹은 직업적·환경적 발병 원인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못한 질병에 대한 사건이라면 진료기록 감정을 통해 의미 있는 소견이 나오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2023년 11월 서울 중구 민주노총에서는 '산재 환자 모욕하는 윤석열씨 규탄 긴급 증언대회'가 열렸다. (사진=뉴시스)
 
심지어 업무 관련성에 대한 기존 연구 결과가 없으면 ‘실증적 연구가 없다’가 아니라 아예 ‘업무 관련성이 없다’는 취지로 감정의 소견이 나오는 경우까지 있다는 겁니다. 최종연 법률사무소 일과사람 변호사는 “의사들은 ‘관련성을 평가할 자료가 없다’고 말하지 않고, ‘관련성이 없다’고 답한다”며 “법관이 의사 판단에 의존하면 노동자가 산재를 인정받기 어렵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근본적으로 업무상 질병 판단에선 법률적 판단이 우선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큽니다. 최 변호사는 “대법원 판례상 질병과 업무의 인과관계는 법률적 판단이지 의학적 판단이 아니다”라며 “법관이 의사에게 판단을 떠넘겨선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임 변호사 역시 “전문가끼리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생길 수는 있으나 의사도 업무 관련성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판사가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강석영 기자 ksy@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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