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검은 옷의 월요일”
2017-11-03 06:00:00 2017-11-03 06:00:00
 2016년 10월 3일 10만 명이 넘는 폴란드 여성들이 검은 옷차림에 검은 우산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고, 독일, 벨기에, 영국 등에서도 이들에 대한 지지 시위가 열렸다.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의 집권 여당인 ‘법과 정의당’에서 ‘여성이 성폭행, 근친상간 등으로 임신하거나 임신부의 생명이 임신을 유지함으로 인해 위협되는 경우에도 전면적으로 낙태를 금지하며 이를 위반하면 최고 징역 5년에 처한다.’는 법안을 논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참다못한 여성들은 “여성의 생식 결정권은 죽었다.”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이날을 ‘검은 월요일’로 명명하였다. ‘대규모 자궁의 반란’에 놀란 폴란드 정부와 의회는 그로부터 3일 후 본회의에서 이 법안을 표결에 부쳐 반대 352표, 찬성 58표의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시켰다. “검은 월요일 시위는 정부에 깊이 생각할 거리를 줬다.” 로스와프 고빈 부총리가 국영 라디오방송에 나와 털어놓은 고백이었다.
 
대한민국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게시판도 ‘검은 월요일의 시위’를 연상케 하는 낙태죄 폐지 청원으로 봇물을 이루고 있다. 30일 현재 23만2천 건이 넘었고, 이제 청와대가 답할 차례가 되었다. 이들 청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사랑은 같이 했는데 왜 여성만 처벌 받나요’, ‘나는 더 이상 자궁이길 거부한다.’ ‘왜 여성을 임신하는 기계 취급하는가’ 등의 글이 올라와 있고, 여성들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울부짖음이 메아리치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이 저출산 국가라고 해서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 ‘이러한 출산은 당사자와 태어나는 아이 그리고 국가 모두에게 비극적인 일이다.’라는 글도 함께 올라와 있다. 또한 기존의 낙태 논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자연유산 유도약 합법화에 관해서도 구체적인 방법과 외국 사례를 거론하며 안전한 낙태를 위해 국가가 나서야한다는 취지의 주장이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 가임기 여성 중 낙태를 경험한 여성은 약 20%인 것으로 나타났다. 보건복지부의 ‘2015년 인공임신중절 국민인식조사’에서, ‘원치 않는 임신’ 때문에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받았다고 답한 응답자 비율은 43.2%에 달하였다. 낙태를 한 본인과 낙태를 하게 해 준 의사 모두 처벌되는 현행법을 고려해본다면 가임기 여성 및 의료진 상당수가 ‘적발되지 않은’ 범죄자로 살고 있는 셈이다.
 
낙태를 범죄로 규정한 이유는 자명하다. 생명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2012년 8월 형법상 ‘동의낙태죄’에 대하여 “태아는 그 자체로 모와 별개의 생명체이고,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므로 생명권이 인정돼야 한다.”는 4명의 합헌 의견과, 이강국 헌재소장 등 재판관 4인의 "임신 초기의 낙태까지 전면적·일률적으로 금지하고 처벌하는 것은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침해의 최소성 원칙에 위배된다."는 위헌 의견이 팽팽히 맞섰지만 위헌 결정을 위한 정족수 6명에 미치지 못하여 합헌 결정이 내려졌다. 자기결정권과 생명권이라는 두 가지 충돌하는 권리 중 생명권이 더 우세하다는 판단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임신중절을 종교적인 이유에서 죄악시하는 일부 카톨릭 국가를 제외하고 미국이나 영국, 일본 등도 일정한 시기까지는 임산부 본인이 낙태 여부를 결정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는 태아를 ‘언제부터 살아 있는 생명체’로 볼 것인가에 따른 판단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예컨대 네덜란드는 ‘착상 이후부터 체외생존 가능성이 생기는 시점’을 24주 이후라고 보고, 이 시기 전에는 낙태에 대한 법적 규제가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태아의 생명권 존중이라는 가치가 국가의 사회 경제적 필요에 의거해 다르게 평가되고 다르게 강요되는 것처럼 보인다는데 문제의 본질이 있다. 즉, 현재 우리는 낙태를 할 경우 임신부와 의사를 모두 처벌하는 쌍벌주의를 채택하며 형식적으로는 낙태를 강력히 규제하고 있지만 경제가 어려워 출산 억제정책이 필요하던 시기인 1973년에는 우생학적· 보건 의학적 사유 등으로 임신중절을 허용하는 모자보건법을 제정하는 방식으로, 1976년에는 사회/경제적 사유를 추가하는 형태로, 그리고, 1983년에는 비혼 여성의 낙태와 2자녀 영세민 가구의 단산 낙태를 합법화하는 등의 개정안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낙태에 대해 허용적이었다.
 
생명권이라는 가치와 자기결정권이라는 가치는 국가의 사회 경제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어도 좋은 정도의 저급한 가치가 아니다. 9인의 재판관 체제가 완성된 현재의 헌재가 이에 대해 어떤 결정을 할지, 그 전에 청와대에서 무슨 답을 내놓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명쾌하고 확실한 답변이 필요한 시기이다.
 
노영희 법무법인 '천일' 변호사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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