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이 말 한마디에는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 동안 추석을 어떤 마음으로 준비하고, 또 어떻게 보내왔는지를 함축하고 있다. 수확의 기쁨, 가족의 만남, 조상에 대한 감사의 정서가 자연스레 담겨 있는 이 명절은 단순한 공휴일 이상의 의미가 있다. 특히, 추석은 농경사회였던 우리 조상들에게 1년 농사의 결실을 기리는 절기이자, 조상께 햅쌀과 햇과일, 햇술로 정성을 올리는 날이었다.
조선 순조 때의 학자 홍석모가 쓴 세시 풍속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848)에는 이런 풍경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술집에서는 햅쌀로 술을 빚어 팔고, 떡집에서는 햅쌀 송편과 무와 호박을 넣은 시루떡을 만든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술은 ‘신도주(新稻酒)’로, 갓 수확한 햅쌀로 빚어 조상께 올리고, 이웃과 나누며 수확의 기쁨을 함께했던 소중한 문화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런 추석의 진짜 의미를 얼마나 지키고 있을까? 지금 대부분의 추석 제사상에는 대형 주류 회사에서 생산한 청주(사케)가 많이 올라간다. 이 중 일부는 과거 ‘정종’이라 불리며 제사상에 자주 올랐던 술인데, 알고 보면 일본식 사케 제조법으로 만들어진 술이다. ‘정종(正宗)’은 원래 일본에서 1840년 처음 만들어진 브랜드 이름이며, 우리나라에서는 1883년 부산의 이마니시 양조장이 처음 생산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 청주 ‘마사무네(正宗, 정종)’가 고급 술로 인식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이 인식은 무비판적으로 이어졌다.
물론 최근에는 누룩을 사용하고 전통 방식으로 만든 전통 약주를 사용하는 비율이 차례상에서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는 분명 긍정적인 변화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가정에서는 전통주가 지닌 깊은 의미보다는 편의성과 브랜드 인지도에 따라 술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고장에서 만들어진 지역 전통주를 차례에 사용해보는 건 어떨까 한다. 전국에는 현재 약 800개 이상의 전통주 양조장이 있다. 지역마다 다양한 농산물을 활용한 술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제조 방식 또한 천차만별이다. 이처럼 지역 전통주는 대량생산된 술이 줄 수 없는 고유한 향과 맛을 지닌다. 지역 사람들의 입맛에 맞춘 술이기에, 그 지역의 차례 음식과도 궁합이 잘 맞는다.
더욱이 추석은 바로 그해에 수확한 햅쌀, 햇곡식, 햇과일을 조상께 바치는 절기이다. 지역에서 방금 수확한 재료로 빚은 전통주를 올리는 것만큼 추석의 정신을 잘 담아낼 수 있는 방식이 있을까 싶다. 차례가 끝난 뒤에는 ‘음복(飮福)’이라 하여 조상께 올렸던 음식을 함께 나눠 먹는 풍습이 있다. 이는 단지 음식 나눔이 아니라, 조상의 복을 이어받는다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이때 마시는 술 한 잔 또한 그 의미에서 예외일 수 없다. 따라서 정성과 철학이 담긴 지역 전통주는 조상과 후손 모두를 위한 선택이 될 것이다.
일각에서는 “차례상에 어떤 술을 올려야 하는가?”를 두고 고민을 한다. 그러나 과거 제사상 차림의 기준이라 알려진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이시(棗栗梨枾)’도 후대에 생긴 내용일 뿐, 절대적인 규칙은 아니다. 술도 마찬가지다. 돌아가신 분이 생전에 즐기시던 술을 올리는 것이 오히려 더 정성스러운 예일 수 있다.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진심’이다.
전통주를 구매하는 일도 이제는 어렵지 않다.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전국 각지의 전통주를 병 단위로 간편하게 주문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지역의 전통주 바틀샵이나 마트나 슈퍼에서 지역 술을 조금씩은 취급하고 있다. 이번 추석에는 고향의 향수와 추억을 담은 한 병의 지역 전통주를 준비해보자. 정성껏 빚은 지역 술은 조상에게 올리는 감사의 마음을 담는 동시에, 모처럼 모인 가족과의 대화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대기업의 술은 명절이 지나도 언제든지 마실 수 있다. 수확의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가장 절실한 추석에, 추석의 의미를 담은 전통주 한 잔을 마셔보자. 한 병의 술이 바꾸는 명절의 풍경. 올해 추석, 우리 전통주로 우리의 추석을 되찾아보자.
이대형 경기도농업기술원 지방농업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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