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백아란 기자·전은비 인턴기자] 한국 경제가 첨단산업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면서 산업 간 격차가 구조적 불균형으로 굳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반도체·AI 등 첨단산업은 고성장을 이어가는 반면, 철강·석유화학 등 전통 제조업은 침체가 심화하고 있어 산업 생태계 전체의 기반이 약해지고 있다는 평가입니다.
서울 남산공원에서 바라본 을지로 마천루 모습. (사진=뉴시스)
첨단산업 쏠림, 산업 근간 위협
전문가들은 산업 불균형과 투자 편중이 단순한 경기 순환적 문제가 아니라 한국 경제의 체력을 갉아먹는 구조적 위기로 나타날 수 있는 만큼 ‘산업구조 전환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서지용 상명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반도체와 같은 특정 산업에 대한 자원 쏠림은 내수경제 위축과 해외 투자 전환 가속화로 이어질 수 있고, 전통산업 경쟁력 약화와 고용·임금 양극화가 심화될 수 있다”며 “첨단산업과 전통산업 간 균형 발전을 위한 융합 지원과 규제 개선, 노동시장 구조 개선 정책을 병행해 산업 간 건강한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특정 산업에 대한 과도한 자원 집중이 산업 근간의 위협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특히 “중소기업의 기술 혁신, 인력 확보, 작업 환경 개선을 지원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협력 생태계를 강화하는 것이 정부의 핵심 역할”이라며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격차 해소를 위한 지역 맞춤형 산업 육성 정책도 필요하다”고 제언했습니다.
조재한 산업연구원 산업정책기획실장은 “AI·디지털 전환, 글로벌 공급망 재편, 기술경쟁 심화, 탄소중립 전환 등 산업 환경 변화 속에서 한국 주력산업은 구조적 전환과 경쟁력 약화라는 도전에 직면했다”며 “신산업과 주력산업 간 공급망, 기술, 인력 연계가 원활하지 않고 일부 산업에 편중된 기술 투자로 산업 전환의 시너지 효과도 제한적인 상황”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조 실장은 “기간산업의 경우 한번 무너지면 피해가 크기 때문에 골든타임을 넘어서 주력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책 패러다임의 전환과 전략적 대응 체계 구축이 시급히 요구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경기 평택시 포승읍 평택항 수출 야적장에 철강 제품이 쌓여 있다. (사진=뉴시스)
무엇보다 문제는 기업 간 양극화가 더 심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성종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석유화학 사업 재편, 부동산 PF에 대한 정리·재구조화 등이 장기화될 경우 석유화학·건설 업종 내 펀더멘털 열위한 기업, 비은행금융기관 등의 부담이 가중될 수 있어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의 고질적 편중을 완화하기 위해 강소기업과 소외된 산업을 보호·지원하는 균형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전통 산업이 첨단산업과 연계해 성장할 수 있는 상생 모델 구축이 이뤄져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이를 위해 지역 기반의 산업 육성, 기술 협력 플랫폼 구축, 인력 재교육 등 산업 생태계 전반을 포괄하는 통합 전략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김진일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방향이 디지털·AI화 되는 것은 분명한데, 이를 전통산업에 어떻게 접목할지가 가장 큰 숙제”라며 “기업들이 AI를 도입해도 노동 절약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많은데, 생산성 자체를 끌어올리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정부의 역할에 대한 중요성도 강조됐습니다. 김 교수는 “모든 전통산업이 첨단산업을 따라잡을 수는 없고 2000년대 인터넷 혁명 때처럼 자연스러운 산업 재편 과정일 수 있다”면서도 “시장에만 맡겨두면 속도가 더디므로 정부가 해결해야 할 영역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재정 투입도 더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역시 “산업구조가 바뀌고 있는 상황에서 석화 등 개별 기업 차원의 자율적 대응에 한계가 있다면 국가적 차원에서 전략적 목표와 산업정책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전남 여수 국가산업단지. (사진=연합뉴스)
해외 사례 벤치마킹 필요성도
산업 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한 다른 나라의 노력도 벤치마킹해야 합니다. 일본의 경우 석유화학업계에 대해 세차례 구조조정을 단행하며 경쟁력을 제고시켰고, 브라질은 항공기 제작사 엠브라에르를 설립하고 클러스트화를 추진한 결과 세계 3~4위 항공기 제조사로 성장시켰습니다. 석유 의존 경제였던 아랍에미리트(UAE)는 1970년대까지 국내총생산(GDP)의 90% 이상을 석유 수출에 의존했으나 관광산업과 금융·무역 허브, 항공·물류 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며 산업구조를 다각화했습니다.
김진일 교수는 “일본이 석유화학산업 구조조정을 통해 범용 제품에서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전환한 것처럼 한국도 충분히 구조 개편이 가능하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이어 “일부 케미컬 기업들은 이미 새로운 제품을 시도하고 있다”며 “AI·디지털 기술과 결합해 생산성이 올라갈 경우 전통산업에서도 물꼬가 트일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산업 간 연결’과 ‘생태계 관점’에서 산업구조를 만들 필요성도 제기됩니다. 기술 융합 시대에는 산업들이 독립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서 교수는 “첨단과 전통 산업의 균형 발전을 위한 융합 지원과 규제 개선, 노동시장 구조 개선이 동시에 이뤄져야 산업 생태계의 건강성이 유지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황용식 교수 또한 “쇠퇴 산업이 있어도 이를 어떻게 연결해 새로운 업사이클을 만들지 고민해야 한다”며 “연결되는 산업으로 키우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최광혁 LS증권 연구원은 “한국이 소규모 수출 주도 성장 국가라는 명성을 갖고 있지만 어떤 국가든지 안정적인 성장에는 내수의 성장이 뒷받침돼야 한다”며 “AI가 혁신적인 변화이고 생산성 향상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언제까지 어떤 흐름을 따라서 변화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변화들이 나타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고 했습니다.
백아란 기자·전은비 인턴기자 alive020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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