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백아란 기자] 정부는 지난 2018년 반도체·디스플레이 종사자의 직업병 입증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산재 승인 간소화 제도’를 발표했습니다. 백혈병, 뇌종양, 폐암, 난소암, 유방암, 다발성경화증 등 8대 상병에 대해 역학조사를 생략해 산재 처리 기간을 단축해 노동자 보호를 강화하겠다는 취지였습니다. 하지만 제도를 도입한지 햇수로 9년이 지났지만, 대상 조건이 까다로워 현장에선 실효성이 크지 않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일반적인 산재 신청은 △의료기관 특별 진찰△연구기관 역학조사 △업무상 질병판정위원회 등 여러 단계의 판단 절차를 거치게 되는데,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종사자가 산재를 신청할 경우엔 각 공단 지사에서 재해 조사를 실시한 이후 업무상 질병 자문위원회에서 동일·유사 업무를 판단하게 됩니다.
만약 과거 판결이나 승인 사례를 통해 업무 관련성이 인정된 희귀질환자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공정’에 종사한 경우라면 업무 관련성 전문 조사(역학조사)를 생략하고 바로 질병판정위원회 업무 관련성 심의를 받고 최종 판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도 시행 이후 9년이 지난 지금, 현실의 체감도는 낮은 실정입니다. 산업재해 신청은 여전히 수년이 걸리고, 간소화 대상 상병임에도 하청 노동자의 경우 원인 증명이 쉽지 않은 데다 현장조사도 더딘 탓입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2024년 기준 평균 산재 판정 처리 기간은 약 7개월(227.7일)이지만, 역학조사에 추가로 걸리는 기간(평균 604.4일) 등을 고려할 때 최장 4년까지 걸리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산재 결과를 기다리다 사망하거나,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고은 노무사는 “‘반도체 종사자 산재 인정 처리 절차’가 간소화되긴 했지만 법률로 명시된 것은 아니다”면서 “전체 반도체 종사자를 아우르기보다는 식각 공정에서의 백혈병과 같이 소단위로 대상 직무 기준이 있고 재직 기간도 정해져 있어 한계가 있다”고 평했습니다.
지난 2월 반도체 산업 자녀산재 피해자가 이른바 자녀산재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백아란기자)
실제 노동부 자료를 보면 간소화 대상 노동자의 경우 2011년 1월1일 이전 입사자 가운데 1996년 1월 이후 퇴직자로 시점이 정해져 있으며, 반도체·LCD 생산 등 작업 공정과 관련 시설의 설치, 정비 및 수리 업무를 한 1년 이상 재직자 중 퇴직 후 10년 이내 발병된 자에 한정됩니다.
반도체를 포함해 전체 직업성 암에 대해 역학조사 없이 질병판정위원회에서 심의된 생략 건수는 2018년 47.9%(58건)에서 2019년 44.1%(86건), 2020년 43.5%(73건)으로 비율이 줄어들다 2021년은 58%(212건)로 절반에 그쳤습니다. 다만 최근 들어서는 2023년 84.7%(210건), 2024년 84%(259건), 2025년 87.4%(507건·잠정)로 올라선 상태입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반도체·디스플레이 업종 작업 환경 개선 상황과 연구용역을 고려할 때 2011년 이전 입사자까지 (역학조사 생략하는 것이) 유의미하다고 봤다”며 “연도별로 봐도 직업성 암에 대해 역학조사를 생략한 비율이 올라가고 있는 상태”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인공지능(AI) 도입 등 업무상 질병에 대한 신속한 산재 승인여부 결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에 대해 이종란 노무사는 “실제 최근 3년(2023년~2025년) 간 반올림에서 대리해 근로복지공단에 접수한 반도체·디스플레이 노동자의 백혈병, 뇌종양 등 업무상 질병 신청 사건은 20건(자녀산재 제외)인데, 조사 진행 중인 4건을 제외하면 16건 중 4건만 역학조사 생략 후 승인됐고 나머지는 다 불승인 됐다”고 반박했습니다. <끝>
백아란 기자 alive020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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