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 경쟁의 세계에서 그 사이에 낀 국가들은 선택의 기로에 있습니다. 강대국에 잘 보이기 위해 서로 경쟁할 것인가, 아니면 힘을 합쳐 영향력 있는 '제3의 길'을 만들 것인가."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가 20일(현지시간)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한 연설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캐나다에서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라는 영토 압박과 관세 압박을 가하는 상황에서 나온 발언이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가 22일(현지시간) 캐나다 퀘벡 시타델에서 열린 내각 포럼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카니 총리는 "세계 질서의 파열, 즉 한 편의 '좋았던 이야기'가 끝나고, 강대국 간의 지정학이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잔혹한 현실'이 시작된 상황에 관해 말하겠다"며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매일 우리는 강대국 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절감한다"며 "'강자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약자는 겪어야 할 일을 겪는다'는 투키디데스의 경구가 마치 거스를 수 없는 국제 관계의 자연적 논리인 것처럼 다시 득세하고 있다"고 현재의 국제 정세를 진단했다. 이어 "이러한 논리 앞에서 많은 국가가 그저 무난하게 지내기 위해 대세를 따르려는 강한 경향을 보인다. 적당히 타협하고, 문제를 피하며, 순응이 안전을 보장해주길 기대하는 것"이라면서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견국들에 행동 촉구…"테이블에 앉지 못하면 메뉴판에 오르게 될 것"
그는 "우리는 지금 단순한 전환기가 아닌 '파열(rupture)'의 한복판에 있다"면서 "중견국들이 의지했던 세계무역기구(WTO), 유엔(UN),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와 같은 다자간 기구들, 즉 공동의 문제 해결을 위한 아키텍처(청사진)는 크게 약화됐다"고 이어갔다. 계속해서 "캐나다와 같은 중견국에 던져진 질문은 이 새로운 현실에 적응할 것인가가 아니다"라며 "진짜 질문은, 단순히 더 높은 담장을 쌓음으로써 적응할 것인가, 아니면 더 야심 찬 무언가를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카니는 그러면서 "중견국들은 함께 행동한다. 테이블에 앉지 못하면 메뉴판에 오르게 될 것이기 때문(if you are not at the table, you are on the menu)"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그의 연설에 핵심 메시지였다. "강대국들은 홀로 갈 여력이 있지만 중견국들은 그렇지 않다"며 "우리가 패권 국가와 단독으로만 협상한다면 우리는 약자의 위치에서 협상하게 된다.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고, 누가 더 잘 순응하느냐를 두고 우리끼리 경쟁하게 된다"면서 "이것은 주권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규칙 기반의 국제질서(rules-based international order)'가 여전히 광고된 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인용하는 일을 멈춰야 한다"며 "지금의 시스템을 있는 그대로 부르자, 강대국 경쟁이 심화되는 시기이며, 가장 강력한 자들이 경제적 통합을 강압의 무기로 사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시대라고 말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옛 질서는 돌아오지 않으며 그것을 애도해서는 안 된다"며 "향수(nostalgia)는 전략이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특히 이날 연설에서 중견국들이 강대국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제3의 길'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사안별로 연대하는 '변동 기하학(Variable Geometry)' 식의 유연한 동맹 체제를 제시했다.
트럼프가 병합 의지를 고집하고 있는 그린란드와 관련해서도 "덴마크와 그린란드의 영토 주권은 타협 대상이 아니다"라고 못 박으면서, 나토 헌장 제5조(집단 방위)에 대한 캐나다의 약속은 "흔들림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트럼프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트럼프의 일방주의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모습을 보였다.
언론과 트럼프는 즉각 카니에게 반응했다. <뉴욕타임스>는 "카니 총리가 강렬한 연설을 했고, 이에 청중석에 있던 세계 각국의 정치 및 기업 지도자들은 보기 드문 기립박수를 보냈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카니의 발언에 동조하며 "우리는 폭력배보다는 존중을, 잔혹 행위보다는 법치를 선호한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이 신문의 칼럼니스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도 "눈부시게 명석한 연설"이라며 "독설이나 과장 없이, 트럼프가 우리 모두를 이끌고 있는 가혹하고 새로운 세계(harsh new world)의 윤곽을 그려냈다"고 상찬했다. 영국 <가디언> 이 연설을 전하면서 "카니가 트럼프에 맞설 준비가 된 냉철한 현실주의자로 부상하고 있다"고 썼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0일(현지시간) 트루스소셜에 올린 사진. 대형 패널 속 지도에 캐나다 영토에 성조기가 표시돼 있다. (사진=연합뉴스)
"카니, 트럼프에 맞설 냉철한 현실주의자"…트럼프는 '발끈'
반면 트럼프는 예상대로 발끈했다. 그는 카니의 연설 다음날 다보스 포럼 연설에서 "캐나다는 우리에게서 많은 공짜 선물(a lot of freebies)을 받고 있다. 그들은 감사해야 마땅한데, 그러지 않고 있다"며 "어제 캐나다 총리의 연설을 봤는데, 그다지 감사해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비난했다. 이어 "캐나다는 미국 덕분에 살아가고 있다. 마크, 다음에 발언할 때는 이 점을 명심하라"며 카니를 직접 거론했다.
그는 연설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미국에 맞서 캐나다의 진로를 모색하고 있다. 지난 16일, 캐나다 총리로서는 9년 만에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하면서, 양국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재설정하는 데 합의했고, 미국이 금지했던 중국산 전기차의 캐나다 수출도 허용했다. 그는 시 주석과 회담한 뒤 "중국과의 관계가 미국과의 관계보다 예측 가능하다"며 "솔직하고 일관된 대화가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트럼프를 직격하기도 했다.
카니는 원래 캐나다은행과 영란은행 총재를 역임해, '중앙은행의 거물'로 불린 경제계 인사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캐나다 경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영란은행 설립 300여년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총재로도 유명하다.
지난해 1월 전임 저스틴 트뤼도가 내부 실정과 함께 트럼프의 영토 압박, 25% 관세 압박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속에 물러난 뒤에 집권 자유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총리직에 올랐다. 그가 지난해 5월, 총리 취임 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트럼프는 그에게 캐나다가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면 어떠냐고 '도발'했고, 카니는 "캐나다는 판매 대상이 아니다"라며 단호하게 일축했다. 이번에 다보스 포럼 연설을 통해 다시 한번 통쾌하게 공개 복수를 한 셈이다.
황방열 통일외교 전문위원 bangyeoulhwa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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