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기호 선임기자] 당신에게 길이란 무엇입니까.
‘제주 올레길’을 만든 서명숙 제주 올레 이사장과 ‘강릉 바우길’을 만든 소설가 이순원 작가는 27일 뉴스토마토 <이광재의 끝내주는 경제>에서 길의 의미를 묻는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의 질문에 “행복한 종합병원”과 “사고의 광장”을 떠올렸습니다.
“47세에 심각하게 아파서 걷기 시작한 게 길”이라고 말한 서 이사장은 “길을 나서면 저절로 의사가 돼서 몸의 근육이 다시 생기고, 정신적으로도 걱정과 근심이라는 쓸데없는 지방이 빠져나가고 자존감 같은 근육이 생긴다”며 “나에게 길은 종합병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작가는 “앉아 있으면 잡생각이 들고, 뛰면 생각할 수 없지만, 길을 걸으면 생각하게 되고, 거리만큼 생각이 정리된다”며 “자신과 통하는 사고의 광장 같은 느낌”이라고 답했습니다.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가 서명숙 제주 올레 이사장, 소설가 이순원 작가와 함께 길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사진 = 뉴스토마토)
‘미친 딸’과 영국 여성 헤니가 만든 길
서 이사장은 아픈 몸을 이끌고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을 걸으면서 올레길을 구상했습니다. 그는 “고향 제주도의 아름다운 마을을 이으면 엄청난 관광 콘텐츠가 될 것 같았다”고 말하고, “올레는 집에서 마을길로 들고 나는 개인 골목길”이라며 “올레를 나서야 제주도를 한 바퀴 돌 수 있고, ‘제주 올래’라는 발음을 중의적 의미로 썼다”고 밝혔습니다.
어머니에게 ‘미친 딸’ 소리를 들어가며 올레길을 시작한 서 이사장은 “자동차 소리가 안 들리는 길”을 우선했습니다. 그는 “그냥 사람들이 생활하는 길, 이웃 마을 가던 길이 도로가 생기면 사라진다”며 “사라진 길을 불러내고, 끊어진 길을 잇고, 바닷가에서 손으로 돌멩이를 평탄화하는 한이 있어도 차 길은 피하려고 했는데, 아스팔트 도로도 일부 있다”고 회상했습니다.
제주연구원 발표에 따르면 제주 올레길의 경제 유발 효과는 연간 1조2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서 이사장은 이런 경제적 수치보다 ‘마을의 자존감’이 생긴 점에 의미를 부여하고, “처음엔 우리 마을엔 아무 것도 볼 게 없다던 주민들이 소박한 돌담에 감동하는 여행자들의 모습에 자신감을 갖고, 보존을 생각하게 된 점이 보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산티아고에서 만나 길을 만들기로 다짐했던 영국 여성 ‘헤니’와 일화도 주목 받았습니다. 서 이사장이 의기투합한 헤니의 주소를 분실한 뒤 각방의 노력 끝에 최근 4개국 올레꾼들이 AI(인공지능)을 활용해 헤니를 찾아낸 것. 환경정당을 만들어 스페인 안달루시아 풍광을 지키는 길을 걷고 있는 헤니는 2월 방한해 서 이사장과 함께 보름간 제주 올레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소설 속 ‘은비령’, 바우길의 지명이 되다
이 작가는 “엮여서 들어갔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제주 올레길을 다녀온 강릉시민의 요청에 “글로 고향을 빛내겠다”고 사양했으나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3년 동안 이기호 탐사대장을 비롯한 산악인과 동행하면서 길에 이야기를 입히게 됐습니다. 바우길은 강원도 감자바우의 친근함과 바빌로니아신화에 등장하는 건강의 여신 ‘바우’를 중의적 의미로 담고 있습니다.
이 작가는 ‘역사성과 마을의 연결’에 집중했습니다. 그는 “고도(古都) 강릉을 중심으로 관동별곡을 쓴 송강 정철,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걸었던 역사적인 스토리텔링과 자동차 없는 길, 숲길을 연결해서 하루에 걸을 수 있고, 마을사람의 삶과 이어지는 17개 코스를 만들 수 있었다”며 ‘예쁜 바우길’을 만드는데 동참한 20여명의 산악인에게 거듭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 작가는 “제주 올레길이 유명해진 뒤 길을 만드는 열풍이 불었는데, 순서로 보면 바우길은 100위권 밖일 것”이라면서도 “현재는 제주 올레길과 강릉 바우길이 대한민국의 양대 트레일”이라고 밝혔습니다. 또 “지금은 강릉사람이 더 많이 걷고, 많이 자랑스러워한다”며 “특히 택시 기사들이 이순원은 몰라도 바우길은 자랑스럽게 설명할 때 가장 뿌듯하다”고 전했습니다.
초·중·고 교과서에 많은 작품을 수록하고 있는 이 작가는 자신의 소설 ‘은비령(隱秘嶺)’이 바우길의 실제 지명으로 포함된 에피소드를 소개했습니다. 1996년 발표한 ‘은비령’은 인제 필례약수 인근을 염두에 둔 가상의 고개입니다. 1997년 제42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하고, 1999년에 KBS 2TV 단편드라마로 소개되는 등 주목을 받으면서 실제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가 서명숙 이사장, 이순원 작가에게 ‘제주 올레길’과 ‘강릉 바우길’에 대해 묻고 있다.(사진 = 뉴스토마토)
원픽은 ‘추자도 올레’와 ‘바다호수길’
서 이사장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올레길 이후 100개가 넘는 길이 우후죽순처럼 생겼지만 바오길에 특별한 애정을 주는 이유는 잘 관리되기 때문”이라며 “길을 내는 것도 좋지만 정성껏 유지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고, “길은 자연과 마을사람과 걷는 사람이 공존하는 곳”이라며 “길을 내준 마을주민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고 당부했습니다.
“길을 만드는 일은 레저산업에 상품을 공급하는 행위”라고 말한 이 작가는 “길을 만드는 분들이 이벤트처럼, 벌이처럼, 노후대책처럼 하지 말고 내가 제일 많이 걷는다는 생각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길을 걷는 분들도 하루 소풍이라는 생각으로 타인의 농작물에 손을 대거나 빈집이라도 함부로 들어가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며 ‘삶의 예의’를 부탁했습니다.
서 이사장은 “40개가 넘는 섬이 흩뿌려진 풍경 사이의 일출·일몰은 그리스 에게해의 어떤 섬보다 극적”이라며 제주 올레길 중 추자도 올레(18-1, 18-2 코스)를 ‘원픽’으로 추천했습니다. 이 작가는 “왼쪽으론 동해, 오른쪽으론 경포호를 끼고 걷는 12km의 해송 숲길은 내내 감탄을 자아낸다”며 KTX 강릉역에서 접근하기 좋은 바다호수길(5 구간)을 첫 손에 꼽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전 지사는 고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빈소를 찾아 유가족을 조문하고, 유시민 전 장관을 만난 사연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인생은 지구라는 별에 왔다가 떠나는 여행자의 삶”이라며 “공동체와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기 위해, 가끔은 제주 올레길과 강릉 바우길을 걸으면서 삶의 여유를 찾길 바란다”는 바람을 전했습니다.
이기호 선임기자 actsky@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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