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안정훈 기자] 영화 ‘다이하드4.0’에서는 ‘파이어 세일’(Fire sale)이라는 전략이 등장합니다. 교통·금융·통신·전력 등의 국가 기반이 되는 시스템을 일거에 해킹해 국가 기능을 마비시키는 전략인데요. 이 모든 시스템이 한 번에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특정 세력의 공격은 아니지만 비슷한 일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지난 28일(현지시각)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발생한 대규모 정전 사태인데요. 토마토Pick은 현대사회에서 에너지가 사라졌을 경우 발생하는 일들을 살펴봤습니다.
지난 28일(현지시각) 스페인 시민들이 마드리드 오픈 테니스 경기장을 돌아다니고 있다. (사진=뉴시스)
스페인-포르투갈 올스톱
양국에서는 지난달 28일 대규모 정전이 발생했습니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와 제2 도시 바르셀로나,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 등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는데요. 도시가 완전히 어둠에 잠기면서 금융과 교통, 통신이 그야말로 ‘올스톱’했습니다. 핵심 인프라가 동시에, 통째로 마비되면서 위기를 맞았는데요. 특히 스페인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정전은 하루만에 복구됐지만 더 큰 문제는 사건 원인인데요. 양국은 아직도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 측에 원인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스페인은 ‘사건 해결에 집중할 때’라며 말을 아끼고 있죠. 일각에서 재생에너지 공급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정부는 이에 대해서도 부정하고 있습니다.
대규모 정전에 인프라 ‘블랙아웃’
정전과 함께 여러 문제가 산발적으로 발생했습니다. 에스컬레이터에 갇히는 사람이 생기고 스포츠 경기가 중단되기도 했죠. 우선 피해가 발생한 것은 교통이었습니다. 모든 도시의 신호등이 마비됐고, 지하철도 멈췄죠. 지하철에 갇히는 시민들이 생겼으며 공항은 아예 멈춰서 여행객들이 발을 동동 굴러야만 했습니다. 고속철도가 멈춰서면서 승객들이 철로 위로 뛰쳐나오는 사태도 벌어졌죠. 특히 위태로운 것은 도로였는데요. 여러 곳에서 엄청난 교통체증이 발생했습니다. 신호등 대신 경찰들이 수신호로 차량을 통제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스페인 최대 일간지 엘파이스는 도로 위 상황에 대해 전국이 마비 상태에 빠졌다고 보도하기도 했죠. 그야말로 무법지대였습니다.
금융권도 큰 혼란을 겪었습니다. 카드나 휴대폰으로 결제하는 시대에 결제시스템이 먹통이 됐기 때문입니다. 휴대전화와 인터넷이 안 되면서 은행 등 각종 금융시스템도 운영에 차질을 빚었죠. 사실상 모든 결제 방식이 현금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죠. 심지어 ATM기까지 작동을 중단하면서 현금을 얻을 길이 사라졌습니다. 은행 앞에는 당장 현금을 인출하기 위해 시민들이 줄지어 서는 현상도 벌어졌습니다. 결제방식이 순식간에 90년대로 후퇴한 셈입니다.
전기 없는 반나절의 공포
사실 이번 정전 사태는 28일 오후부터 시작해 그날 밤까지 반나절간 진행됐습니다. 그날 밤엔 복구율이 60%를 넘어서 국가 기능을 위해 필수적인 인프라에는 전력을 공급할 수 있었죠. 그러나 스페인은 이 반나절을 버티지 못하고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했습니다. 그만큼 위험하고 대응할 방안이 마땅찮았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고도로 첨단화된 사회에서 기술이 사라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가 반나절만에 고스란히 드러난 셈이죠.
이번 사태에 대해 일각에서는 러시아의 에너지 인프라 공격 가능성을 제기했는데요. 러시아의 소행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나온 바는 없습니다. 그러나 무법지대에 놓인 가운데 시민들의 불안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한국과 비슷한 스페인
일각에서는 우리나라가 스페인에서 벌어진 이번 사태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스페인의 대규모 정전 사태는 고립된 전력 계통과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면서 생긴 전력망 불안정성 등이 원인으로 꼽히는데요. 우리나라는 △고리원전(부산) △한빛원전(전남 영광) △한울원전(경북 울진) 등 지방에서 전력을 생산해 수도권으로 보내는 방식입니다. 이 과정에서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는 송전망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삼면이 바다고, 북한과 인접한 환경이라 유럽처럼 타국과 전력망을 공유하기도 어렵고요. 신재생에너지의 경우 이상기후에 취약하고 환경의 영향을 받는데 이상기후는 스페인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도 겪는 세계 공통적 위기입니다. 즉 우리나라의 전력망 환경은 스페인과 유사하며 같은 위기에 놓인 처지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최근 인공지능(AI)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조기 대선을 앞두고 유력한 주자들이 모두 AI 분야와 관련한 공약을 내는 실정인데요. AI가 우리나라 경쟁력을 좌우할 분야라고 입을 모아 말합니다. 그러나 AI 분야는 대표적인 ‘전기 먹는 하마’로 안정적인 전력망이 필수입니다. 그 외에도 전기차, 배터리, 반도체 등 우리나라 주력 산업은 모두 안정적인 전력망을 요구합니다.
스페인 하루 정전으로 인한 손실이 약 7조원으로 추산되는데요. 우리나라에서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어느 정도의 피해가 나올지 짐작도 어렵습니다. 대선을 코앞에 둔 지금, 막연한 투자만이 아니라 촘촘한 전력망 구축도 논의해야 할 때입니다.
안정훈 기자 ajh76063111@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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