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쿨하게 사과하라
2025-06-02 06:00:00 2025-06-02 06:00:00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가 지난달 30일 열린 국회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징계안 관련 입장을 밝힌 뒤 수어통역사와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1년에 출간된 <쿨하게 사과하라>(김호·정재승 공저)는 지금도 정치, 경제 분야에서 '사과' 관련 이슈가 불거질 때 종종 인용되는 책입니다. 자기 잘못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거나, 내용과 태도 모두 잘못된 사과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 이 책이 제시하는 '쿨한' 충고와 조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책 중간에 '사과가 갖춰야 할 6가지 충분조건'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 '미안해'라는 말 뒤에 '하지만', '다만' 이런 말을 덧붙이지 말라. (핑계대지 말라는 뜻입니다.) 둘째, 미안하다고 말할 때는 '무엇이 미안한지' 구체적으로 표현하라. (잘못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라는 뜻입니다.) 셋째, 유감 표명을 넘어 "내가 잘못했어"라고 명확히 표현하라. ("유감"이라는 말은 사과가 아닙니다.) 넷째, 개선 의지나 보상 의사를 표현하라. (상대의 예상을 뛰어넘으면 더 좋습니다.) 다섯째, 재발 방지를 약속하라. 여섯째, 쉽지 않은 일이지만 상대에게 용서를 청하라. ("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는 가장 어려운 사과 표현이며, 자존심 강한 사람에겐 특히 그렇다고 합니다.)
 
그리고 위 6가지 조건의 전제는, 사과를 하는 사람의 입장이 아닌, 사과를 받는 사람의 처지에서 진정성이 느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난 당신이 미안하다고 말하길 원하는게 아니다. 당신이 미안하다고 느끼는 걸 원한다." 이 짧은 문장에 사과의 핵심이 있습니다.
 
대통령선거가 내일이면 막을 내립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사과 이야기를 꺼낸 건, 이번 대선전 끝자락을 지배한 이슈는 다름 아닌 '실수와 사과'가 아닐까 싶기 때문입니다.
 
크고 작은 '설화'가 있었지만, 압권은 이준석의 '진정성 없는' 사과였습니다. 혐오·폭력 발언 이후 뻔뻔한 변명과 궤변, 초점 흐리기로 일관하며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었죠.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마지못해 "상처받으신 모든 분들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했지만, 놀랍게도 그 상대는 TV를 지켜봤던 전국민이 아니라, 자신의 이메일을 받는 당원들이었습니다. 위 6가지 조건을 전혀 충족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진정성이 1도 느껴지지 않는, 즉 사과가 아닌 면피성 당원 독려 행위였습니다.
 
지난 토요일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내놓은 김문수 후보의 사과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의힘이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깊이 반성하고 진솔하게 사과드린다. 혼나겠다. 반성하겠다. 자기희생과 읍참마속, 정책 혁신을 게을리하지 않겠다." 사과는 있는데, 무얼 잘못했다는 것인지, 뭘 희생하고, 누구를 읍참마속하겠다는 것인지, 알맹이가 전혀 없습니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구체적인 계획도 없는 이런 사과는 하지 않는 게 나았습니다.
 
진보진영 논객 유시민씨의 발언 논란도 마찬가지입니다. "표현이 거칠었다"는 건 인정하면서도, 김문수 후보의 부인 설난영씨에 대한 "내재적 접근법을 한 것"이라는 등 엉뚱하고 현학적인 변명만 잔뜩 늘어놓았습니다. 이재명 후보는 "(유씨가) 사과했으니, 국민들이 용서하지 않을까"라고 했지만, 유씨의 발언은 사과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2차 가해'에 가깝습니다.
 
'개사과'로 시작한 정권이 3년 내내 국민들에게 사과 한마디 없이 버티다 결국 붕괴하는 걸 우리는 목격한 바 있습니다. 그 붕괴로 인해 치러지는 선거에서 또다시 '개사과'가 판을 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쿨하게 사과하라>의 저자들은 "21세기에는 사과가 '리더의 언어’가 됐다"고 소개합니다. 과거엔 리더가 사과하는 게 치명적 흠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겼지만, 지금은 사과를 '잘하는' 것이 리더의 덕목인 시대라는 겁니다. 리더도 오판하고 실수를 합니다.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는 게 리더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과 책임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진정성 있게 사과하는 공감능력을 보여주면, 더 많은 신뢰를 쌓을 수 있는 게 또한 리더의 자리입니다.
 
한국정치에서 사과의 언어를 좀 더 많이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도자가 되고 싶다면, 언제든 '쿨하게 사과'하시길 권합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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