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상사전문법원 도입, 상법개정의 마지막 단추
2025-06-12 06:00:00 2025-06-12 08:36:56
최근 국회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을 둘러싸고 재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하는 것이 기업 경영을 위축시키고 소송을 남발하게 만들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해외 주요국의 사례를 면밀히 검토해보면, 이러한 우려는 현실과 동떨어진 기우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먼저 영국의 사례를 살펴보자. 영국 회사법(Companies Act 2006)은 이사의 의무 대상에 주주를 명시하고 있으며, 2007년 도입된 대표소송(derivative action) 제도는 주주가 회사를 대신해 이사의 책임을 추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도입 이후 8년간의 통계를 보면, 실제 대표소송이 제기된 건수는 극히 적었고, 법원의 허가를 받아 진행된 사건은 더욱 소수에 불과했다. 이는 법원이 엄격한 허가 기준을 적용하여 남소를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점은 영국 법원이 소송 허가 단계에서 '선의의 이사가 동일한 소송을 제기했을 것인가'를 핵심 판단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또한 회사가 해당 행위를 추인했거나, 주주가 개인적으로 소를 제기할 수 있는 경우에는 대표소송을 불허하는 등 다층적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2023년 기후변화 관련 대표소송 사례에서도 영국 법원은 이사회의 경영판단을 존중하며 소송을 기각했다.
 
미국 델라웨어주의 경우, 기업법의 메카로 불리며 포춘 500대 기업의 3분의 2가 이곳에 설립되어 있다. 델라웨어 회사법은 이사가 회사와 주주에 대해 충실의무를 부담한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실제 소송 통계를 보면 무분별한 소송 남발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경영판단의 원칙(Business Judgment Rule)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어, 이사가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선의로 내린 결정은 설령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법적 책임을 묻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와 법체계가 유사한 대륙법계 국가들의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독일의 경우 주식법(Aktiengesetz)에서 이사의 의무를 규정하면서 주주의 이익 보호를 명시하고 있으며, 일본 역시 회사법 개정을 통해 주주 보호를 강화하는 추세다. 그러나 이들 국가에서도 기업 경영이 마비되거나 소송이 폭증했다는 보고는 없다오히려 이러한 제도는 기업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높이고 소액주주의 신뢰를 강화함으로써 자본시장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특히 최근 ESG 경영이 강조되면서 이사의 주주에 대한 책임은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잡아가는 추세다.
 
재계가 우려하는 배임죄 적용 확대 문제도 과도한 걱정이다. 우리 형법상 배임죄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손해를 가한 경우에만 성립한다. 단순히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가 포함된다고 해서 모든 경영판단이 배임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우리 상법은 이미 이사의 책임을 제한하는 다양한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이사의 책임감경 규정(상법 제400), 경영판단에 대한 면책 법리, 주주총회의 추인을 통한 책임 면제 등이 그것이다. 법원 역시 경영판단의 영역에서는 이사의 재량을 폭넓게 인정하는 것이 확립된 판례의 태도다실제로 경제개혁연대,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지적하듯이, 현행 제도 하에서도 소액주주들이 실효적인 권리 구제를 받기는 쉽지 않은 실정이다. 오히려 지배주주의 사익편취나 터널링 등 불공정 행위에 대한 견제 장치가 미흡하다는 비판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다만, 새로운 제도 도입에 따른 법적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상사전문법원의 설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델라웨어의 형평법원(Court of Chancery)이나 영국의 상사법원(Commercial Court) 200년 이상의 역사를 통해 축적된 전문성과 일관된 판례로 기업들에게 높은 예측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특히 델라웨어 형평법원은 기업법 전문 판사들이 배타적으로 기업 관련 분쟁을 다루며, 신속한 구제명령(injunction)부터 복잡한 M&A 분쟁까지 전문적으로 처리한다. 판사들은 대부분 기업법 분야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전문가들로, 복잡한 기업 거래의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영국 상사법원 역시 13명의 전문 판사가 복잡한 상사분쟁을 전담하며, 특히 금융시장 관련 사건을 다루는 별도의 Financial List를 운영하는 등 전문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들 법원의 판결은 단순히 법리적 판단을 넘어 기업 실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기에, 기업들도 신뢰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미 특허법원, 가정법원 등 전문법원 체계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만큼, 상사전문법원 설치는 충분히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 회생법원처럼 이미 전문성을 축적한 조직을 확대 개편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이사의 주주충실의무 도입은 단순히 소액주주 보호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 자본시장의 신뢰성을 높이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며, 궁극적으로는 기업가치를 제고하는 길이다. 선진국의 경험은 이러한 제도가 책임감 있는 경영을 유도하면서도 기업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재계가 진정으로 우려해야 할 것은 법 개정이 아니라, 변화하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뒤처지는 것이다. ESG 경영, 스튜어드십 코드, 주주행동주의 등 새로운 흐름 속에서 이사의 주주에 대한 책임 강화는 피할 수 없는 대세다.
이제는 소모적인 반대보다는 제도의 연착륙을 위한 건설적인 논의에 집중해야 할 때다. 상사전문법원 설치와 함께 기업 실무에 맞는 세부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판례 축적을 통해 예측가능성을 높여나간다면, 새로운 제도는 우리 기업과 자본시장 모두에게 윈-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윤태준 액트 기업지배구조연구소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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