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문명이 나를 침범하는 걸 어느 선까지 용인해야 할까?
2025-07-23 06:00:00 2025-07-30 10:28:29
분명 지하 2층에 주차했는데 차가 왜 없지? 
2층이 아니라 3층이었나? 
뭐야, 3층에도 없잖아. 
내가 차를 가져오긴 한 거야? 가만, 내게 차가 있었나? 
 
지하 주차장에 차를 두면 늘 이런 피곤한 질문을 하곤 했다. 그러다 누군가 휴대폰을 꺼내 차의 위치를 찰칵 사진으로 찍는 걸 봤다. 오호, 저런 방법이 있었다니. 천재다. 천재를 만난 이후 나도 내 차의 위치를 찰칵 사진으로 찍어 둔다. 물론 사진기가 달린 전화기라는 문명을 사용한다. 나 같은 둔재는 조용히 천재를 따라하면 손해 볼 일은 없다. 
 
문명은 내가 기억에서 지우라고 명령하지 않으면 내 차가 B2 라-37에 있다는 걸 까먹는 일이 없다. 놈의 기억력은 마모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기억력이 좋다고 인성까지 좋은 건 아니다. 놈은 교활하거나 앙큼하거나 최소한 비겁하다. 입으로는 세상을 바꾼다고 떠들고 다니면서 실은 세상이 아니라 인간을 바꾼다. 엄한 부모도 바꾸지 못한, 독한 선생들도 바꾸기를 포기한 나를 바꾼다. 어떻게 바꿀까. 달콤한 사탕을 쥐어 주며 바꾼다. 문명이 내게 쥐어 주는 사탕은 무엇일까.
 
효율.
편리.
 
문명은 내게 효율과 편리를 주고 그 대가로 내 머릿속에 든 것들을 하나둘 압수하기 시작했다. 이제 내 머리가 기억하는 전화번호는 없다. 내 어머니 번호도 그녀와 일면식 없는 문명이 기억한다. 놈이 경로를 이탈했다고 수선을 떨면 나는 한동안 낑낑 식은땀을 흘려야 한다. 놈이 손에 없으면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눈뜬장님이 되어 버렸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입술을 떼지 않고 내 말을 받는다. 나도 그래. 나도 사탕에 넘어갔어.
 
이해하기 어려운 건 나다. 교활하거나 앙큼하거나 비겁한 문명을 대하는 나의 태도다. 나는 나를 훔쳐 간 문명에게 시비하지 않는다. 항의하지 않는다. 나의 퇴화를 문제 삼지도 않는다. 오히려 내 머리보다 문명의 충직함을 더 깊숙이 믿는다. 놈이 하루하루 내 기억력을 갉아 먹고 있다는 걸 알면서 모른 척한다. 행여 놈이 토라져 나를 두고 멀리 떠나지 않을까 걱정한다. 
 
문명과는 어디까지 타협해야 할까. 문명이 나를 침범하는 걸 어느 선까지 용인해야 할까. 어려운 문제다. 문명에게 물으면 그 빈틈없는 계산력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답을 찾아낼 테니 그럴 수도 없다. 나는 나에게 물었고 내가 내놓은 답이 정답이라고 우기기로 했다. 
 
기억력과 계산력은 문명에게 양보한다. 
상상력은 양보하지 않는다. 
 
내 상상력이 문명을 제압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이것마저 내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 이 글도 태어날 수 없을 것 같아서.
 
새 정부가 들어서고 국민의 기대도 한층 부풀었다. 국민엔 나도 포함된다. 특히 AI라는 미래 먹거리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두 팔 들어 환영할 일이다. 치열하게 또 치밀하게 경쟁력을 갖춰 갈 거라 믿는다. 다만 여기에 보탤 말이 하나 있다. AI라는 문명만 보고 경주마처럼 달리면 자칫 잃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바로 사람이다. 사람 냄새다. 사람을 소외하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사람과 나란히 가는 인공지능을 기대한다.  
 
문명의 반대말이 무어냐고 굳이 묻는다면 누구나 야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래, 문명은 야만을 따돌리고 달리는 게 신이 나 과속할 수 있다. 문제는 과속을 타일러야 할 우리들이다. 문명의 속도에 과한 박수를 보내는 우리들이다. 야만에서 멀어지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문명이 자꾸 눈에 보여서 하는 말이다. 
 
정철 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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