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한동인 기자] 미국의 관세 압박이 '식량 안보' 영역을 넘어 국가 입법 영역까지 확대하고 있습니다. 유럽연합(EU)과 미국이 관세 협상에 합의하긴 했지만, 미국이 '디지털 규제' 재검토를 요구하며 갈등의 불씨를 살려놓은 영향인데요. 미국은 이미 의회 차원에서 우리 국회의 '온라인 플랫폼법'(온플법)에 대한 견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미국 측 전략에 대해 "반중국 경제·안보 협력을 강조하는 '통상 압박'이 목적"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스코틀랜드 에어셔의 프레스트윅 공항에 도착해 취재진에 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재계부터 의회까지…미, 전방위 '압박'
28일 대통령실 및 관계 부처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다음 달 1일(현지시간)로 예정된 상호관세 유예기간 종료를 앞두고 조선산업 협력 강화뿐 아니라 농산물 시장 추가 개방까지 협상 카드로 고려하고 있습니다.
애초 우리 정부는 쌀과 소고기 등에 대해 식량 안보 차원의 문제라고 판단하고 협상의 '레드라인'으로 설정한 바 있습니다. 정부 고위관계자도 "농촌 경제와 국가 식량 안보에 직결되며 국민 반감도 크다"며 "협상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이 정부의 공식 입장"이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전방위 압박에 우리 정부의 입장은 바이오에탄올 등 연료용 농산물 수입 확대를 제한적 허용하는 방향으로 한발 물러섰습니다. 이미 미국과 관세 협상을 타결한 국가 대부분은 미국에 농·축산물 시장을 '전면' 혹은 '제한적' 개방으로 합의했는데요.
미국의 압박은 우리 행정·입법부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모양새입니다. 핵심은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한 온플법입니다. 재계를 대변하는 미국상공회의소 등은 윤석열정부 때부터 공개적으로 온플법에 반대 입장을 드러냈습니다.
지난 1일에는 미국 하원으로 압박이 확대됐습니다. 이날 미 하원 의원 43명 명의로 트럼프 행정부에 한국 무역 협상에서 온플법을 의제로 다루라고 촉구했고 지난 24일에는 미 하원 법제사법위원회가 우리 공정거래위원회에 온플법 관련 미국 기업의 영향을 설명하라고 서한을 보냈습니다.
온라인 플랫폼 등 빅테크 기업의 독과점 횡포를 막고 소상공인 등의 안정성 확보를 위해 우리 국회가 논의 중인 온플법에 미국 재계와 입법부의 입김이 거세지기 시작한 겁니다. 결과적으로 이 같은 흐름은 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한·미 관세 협상에도 영향이 불가피해졌습니다.
법안 '속도조절'에 '이원화'까지…일각선 "내정간섭" 반발
이에 우리 국회는 지난 22일 정무위원회 제2차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17건의 온플법 관련 내용을 점검했지만, 추후 단계는 미뤄놓은 상태입니다. 정무위 소속 야당 관계자 역시 <뉴스토마토>와 통화에서 "온플법 관련 논의는 일단 8월 이후로 미뤄놓은 상태"라며 "관세 협상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습니다.
정부와 여당은 온플법 입법에 있어 관세 협상의 여파를 고려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기업의 독과점을 규제하는 '독점규제법'과 플랫폼 기업과 입점 업체의 갑을 관계를 규정하는 '공정화법'으로 이원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집니다. 미국의 반발을 고려해 플랫폼 기업에 대한 규제보다, 소상공인 보호부터 추진하겠다는 겁니다. 온플법 관련 담당 부처인 공정거래위원장 인선이 늦어지는 것 역시 관세 협상에 대한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기 위한 조치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이 같은 우리의 대처를 관세 협상에 활용해야 한다는 제언도 있습니다. 김용희 숭실대 경영학과 교수는 "온플법은 미국 입장에서 관세를 추가 부과할 수 있는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라며 "플랫폼 규제를 기존에 공정거래법이나 통신망법 등을 활용하고, 지금은 온플법 등의 규제에 시차를 둬서 관세 협상에 불리함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다만 참여연대 등으로 구성된 시민단체 '온라인플랫폼법제정촉구공동행동'은 "미 하원이 공정위에 미국으로 와서 온플법이 미국 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라는 서한을 보낸 것은 명백한 미국의 내정간섭"이라며 "미국 기업이 한국에서 시장 독과점과 불공정 행위를 저질러도 제재를 받지 않도록 '불법 면허'를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미, 핵심 메시지 '대중국 견제 동참'"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보호주의 무역을 강화한 건 '미국 우선주의'에 기반한 것도 있지만 미·중 전략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조치라는 해석이 일반적입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대중국 견제를 위해 동맹국의 협조와 희생도 수반돼야 한다는 것이 트럼프 대통령의 구상인데요.
한·미의원연맹 소속으로 미국을 방문한 의원들은 관세 협상 과정에서 나온 미국 측의 요구가 '대중국 견제'라고 했습니다.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26일 페이스북에 "미국 측 핵심 메시지는 '미국에 줄 수 있는 협상 카드를 확실히 가져와라'라는 것과 '대중국 견제에 확실히 동참하라'라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도 "방문 기간 상·하원의원은 물론 싱크탱크 관계자들로부터 반복해서 들은 단어는 '중국'"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한·미 고위급 통상 협상에서 플랫폼법을 비롯한 디지털 교역 문제가 핵심 의제로 부상했는데요. 플랫폼법 역시 중국 견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김 교수는 "온플법의 시행 대상을 따지고 보면 중국 기업들은 같은 규제 체계에서도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받고, 미국 정보통신(IT) 기업들이 주요 규제 대상에 들어가게 된다"고 짚었습니다.
결국 조선업 협력을 통해 중국의 해상패권을 견제하고, 온플법 등 디지털 규제를 막아 중국 기업과의 경쟁력을 보존하려는 미국의 압박에서 우리 정부가 어떤 해법을 모색할지 주목됩니다.
한동인 기자 bbha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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