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압 측정 중인 청소년. (사진=American Heart Association)
[뉴스토마토 임삼진 객원기자] 아이의 건강검진에서 흔히 간과되는 지표 가운데 하나가 혈압입니다. 성장 곡선이나 체중, 시력과 달리 혈압은 성인병과 연결된다는 인식 때문에 아동 검진에서 소홀히 다뤄집니다. 그런데 미국심장협회(AHA)가 2025년 9월7일 발표한 연구 결과는 이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뒤흔듭니다.
7세때 혈압이 평생의 건강 궤적을 바꾼다
이번 연구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출생 코호트인 ‘태아-신생아 협동 프로젝트(Collaborative Perinatal Project, CPP)’에 참여한 아동 3만8000여명을 47년간 추적 관찰한 결과물입니다. CPP는 1959~1965년 사이에 태어난 아동을 대상으로 산전·출생·성장 과정의 환경과 건강을 기록한 대규모 장기 프로젝트입니다.
연구팀은 이 가운데 7세 때 혈압을 측정한 기록을 분석하고, 성인이 된 뒤의 사망 원인을 미국 국립사망지표시스템(NDI)을 통해 추적했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7세 시점에서 혈압이 상위 10%에 해당했던 아동은 50대 중반에 심혈관질환으로 조기 사망할 위험이 40~50% 높았습니다.
더 주목할 점은 ‘경계선’에 있던 아이들입니다. 고혈압 기준(95백분위수 이상)에 들지 않아도, 평균보다 약간 높은 수준(90~94백분위수)인 ‘높은 혈압’ 그룹 역시 성인기 사망 위험이 뚜렷이 증가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조기 심혈관 사망 위험이 40% 이상 상승했습니다.
이처럼 ‘조금 높은 혈압’조차도 수십 년 뒤 심장 건강의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어린 시절부터 혈압 관리가 필수임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형제 비교로 드러난 ‘혈압 독립 효과’
연구팀은 분석을 더 정교하게 하기 위해 CPP에 포함된 형제 집단 150쌍을 따로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같은 가정 환경, 같은 식습관, 같은 경제적 조건에서 자란 형제라도, 혈압이 더 높았던 아이는 15~19% 더 높은 심혈관 사망 위험을 보였습니다.
이 결과는 고혈압 위험이 단순히 비만, 영양 상태, 혹은 가정 배경 탓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혈압 수치 자체가 독립적으로 미래 건강을 결정짓는 강력한 변수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연구를 주도한 노스웨스턴대 예방의학과 알렉사 프리드먼(Alexa Freedman) 교수는 “우리는 단 한 번의 혈압 측정이 수십 년 뒤 생존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라며, “아동기 혈압은 평생의 건강 궤적을 바꾸는 시작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번 연구는 단순한 상관관계 분석을 넘어, 혈압이라는 수치가 실제로 사망 위험을 끌어올리는 인과적 요소임을 입증한 것입니다.
물론 이 연구에는 한계도 있습니다. 당시 아이들의 생활습관은 오늘날과 달랐고, 1960~70년대에 측정된 혈압을 단 한 차례만 반영했다는 점에서 변동성을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또 인종적 구성이 흑인과 백인에 편중돼 있어 결과를 전 세계 모든 아동에 일반화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연구는 “어린 시절 혈압도 성인기 건강을 좌우한다”는 점을 가장 장기간, 가장 대규모로 입증한 연구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 던지는 경고
이번 연구 결과는 한국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집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심혈관질환 사망률이 여전히 높은 편이고, 최근 들어 아동·청소년 비만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소아 비만은 혈압 상승과 직결되는 위험 요인입니다.
질병관리청 조사에 따르면, 6~18세 소아·청소년 비만율은 2006년 8.7%에서 2022년 15%를 넘어섰습니다. 특히 남학생의 경우 비만율이 18%에 달해, 5명 중 1명꼴로 비만 위험군에 속합니다. 소아 비만의 급증은 곧 소아 고혈압의 증가를 의미하며, 이는 장차 한국 사회의 심장질환 부담을 폭발적으로 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소아·청소년 건강검진 체계에서는 여전히 혈압 측정이 형식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고, 일부 학교 검진에서는 혈압을 아예 건너뛰기도 합니다. “어린 나이에는 혈압은 중요하지 않다”는 사회적 인식이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연구가 던지는 메시지는 아동기부터 혈압을 정기적으로 측정하고, 고혈압 위험군을 조기에 찾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아동 건강검진에 혈압을 필수 항목으로 포함해야 하고, 결과를 학부모들도 이를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학교 급식에서 나트륨을 줄이고, 운동 시간을 보장하는 생활환경 개선도 병행돼야 합니다. 아동기 혈압에 대한 가정과 학교의 인식 전환이 요구됩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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