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염을 피해 중앙박물관에 유물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관람객의 긴 줄을 보고 실내 촬영을 포기하고 귀가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중앙박물관에 길게 줄을 선 관객들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에 나오는 캐릭터 상품을 사려던 것이다.
'케데헌'은 한국계 캐나다인 매기 강과 미국의 크리스 에펠한스 감독이 공동 연출한 에니메이션으로 K-팝 아이돌 가수이자 악령 사냥꾼인 걸그룹 헌트릭스가 악귀들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이다. 케데헌은 넷플리스 역대 애니메이션 중 최고의 시청률을 올렸고 역대 1위 영화의 시청률을 곧 앞지를 것으로 예상된다. 9월5일 현재 '케데헌'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OST) ‘골든’은 영국 오피셜 차트 ‘톱 100’에서 4주 연속 1위를 차지했고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 100’에서도 통산 3주째 1위를 차지하면 양대 팝 시장을 모두 석권하고 있다.
'케데헌'의 세계적 열기는 K-팝과 K-컬처가 새로운 기회를 맞았음을 알리는 놀라운 신호다. K-팝은 21세기 문화산업에서 가장 주목받는 현상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BTS, 블랙핑크, 뉴진스 등 다양한 그룹이 전 세계 팬덤을 확보하며, 한국을 넘어 세계 문화의 흐름을 이끌고 있다.
K-팝은 어떻게 세계적 인기를 얻었을까? 그 요인은 매체, 콘텐츠, 그리고 한국의 위상 3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우선 매체 측면에서 K-팝은 한국이라는 특정 문화적 환경에서 출발했지만 인터넷 매체(유튜브, SNS)를 활용해 세계 시장을 겨냥했기에 세계적 음악이 되었다. 인터넷 매체를 통한 K-팝의 글로벌 확산과 정착은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의 '탈영토화-재영토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탈영토화-재영토화의 한 예로 도시로 나간 중세 농민의 도시 정착을 들 수 있다. 중세의 봉건적 소유에서 가장 먼저 탈영토화된 사람들은 도시로 나간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라는 영토 위에 재영토화되었고, 스스로를 농촌으로부터 분리하고 상업을 도시 내부로 제한했다. 탈영토화-재영토화의 개념은 영토를 포함하여 소속 집단, 장르, 관계, 의미 등으로 확장될 수 있다. 문화나 정보도 본래 속한 영역을 넘어 다른 공간으로 탈영토화하여 그 공간에서 새로운 맥락에서 재영토화할 수 있다.
인터넷을 통해 K-팝은 국가나 물리적 공간에서 탈영토화하여 다른 국가, 그리고 가상공간의 문화 환경 속에서 수용되고 변형되면서 재영토화되었다. 팬들은 아이돌의 무대 영상을 보면서 자기 나라 언어로 따라 부르고, 춤도 따라 추면서 그 영상을 찍어 유투브나 SNS에 공유하거나, 현지 스타일로 뮤직 비디오를 리메이크한다. 이렇게 재영토화된 K-팝은 다시 본류와 상호작용하면서 새로운 음악적 경향을 낳았다. 그리고 BTS의 '아미'처럼 글로벌 팬덤은 단순 소비자가 아니라 K-팝의 재영토화를 이끄는 적극적 행위자가 된다. K-팝의 탈영토화-재영토화의 순환 구조가 정착되어 K-팝이 한국 음악에서 벗어나 세계인의 음악으로 자리 잡았다.
둘째로 콘텐츠 측면에서 K-팝은 개방성과 유연성을 가지며 팬들이 몰입할 수 있는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특징도 K-팝의 전달 매체가 주로 인터넷이라는 점에서 나온다. 마셜 매클루언은 “매체는 메시지”라고 말했다. 이는 매체의 선택이 메시지(즉 콘텐츠) 성격을 결정하고 수용자의 감각 체계를 재편하게 된다는 것이다. K-팝은 팝, 힙합, EDM, R&B 등의 다양한 장르를 혼합해 글로벌 트렌드를 빠르게 반영한다.
유튜브나 SNS는 TV와 같은 전통 매체보다 수용자를 콘텐츠에 더 몰입하게 한다. 노래와 일사불란한 군무와 같은 시각적 무대 연출은 음악을 눈으로 보는 경험을 제공한다. 장기간 철저히 훈련되어 노래와 군무의 무리 없이 소화하여 콘텐츠의 몰입도를 높인다. 또한 좋아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시청하여 팬들이 따라 할 수 있게 만들어 모방의 즐거움을 준다. 인간은 원래 모방을 통해 학습하고 즐거움을 얻는다. 인간의 뇌 속에는 타인의 감정을 내 것처럼 느끼는 신경 매커니즘이 있다.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을 따라 할 때 아이돌 스타가 된 듯한 느낌은 즐거움을 한껏 고조시킨다. 모방을 통해 얻는 카타르시스적 체험 때문에 사람들은 예술에 끌린다. 특히 어린 나이에는 모방의 매력은 거부하기 힘들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특별한 위상은 K-팝이나 K-컬처의 팬들이 주인공과의 감정이입을 촉진한다. 역사적으로 문화를 세계적으로 선도하는 국가는 패권 국가나 혹은 패권을 다투는 국가였다. 이들은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지배했거나 패권을 통해 다른 국가들을 선도했다.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짧은 시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내 선진국이 되었다. 식민지에서 독립하여 다른 나라를 지배하지 않았던 국가가 세계적으로 문화를 선도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이런 국가의 위상으로 한국인은 “성공했지만 티를 내려 하지 않는 노겸군자(勞謙君子)”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중 간 양육강식의 패권 경쟁의 시대에 겸손한 국가에서 만든 문화 콘텐츠에 세계인은 공감하게 된다. 인간은 성공해도 교만한 사람과는 공감하기 어렵지만 성공해도 겸손한 사람과 쉽게 공감하게 된다. K-팝과 한류의 성공에는 이런 한국의 위상이 한몫했다.
K-팝이나 K-컬처에 대한 축적된 세계인의 인식은 한국의 국가 브랜드다. 기업 브랜드로 치면 K-컬처 혹은 한류는 모(母) 브랜드이고 K-팝은 그 아래에 속한 자(子) 브랜드에 해당한다. K-팝, K-드라마, K-게임, K-웹툰 등은 K-컬처를 구성하는 자 브랜드들의 네트워크다. K-팝은 K-컬처 네트워크의 중심 브랜드(flagship brand)다. '케데헌'의 성공은 K-컬쳐와 K-팝 브랜드는 개념 정립 단계에서 개념 확장·활용 단계로 들어섰음을 알려주는 놀라운 신호다.
'케데헌'의 성공은 K-팝이 K-컬처를 구성하는 다른 자(子) 브랜드인 드라마, 게임, 음식 등으로 확장해 융합적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케데헌'은 K-팝 장르에서 탈영토화하여 영웅 서사로 재영토화한 것이다. K-팝 아이돌을 악인과 맞서 싸워 정의를 구현하는 영웅 캐릭터로 변형시킨 것이 '케데헌'이다. 그리고 이런 영웅 서사를 한국적 배경에서 풀어 나갔다.이렇게 영웅 서사로 변형되면서 그동안 K-팝에 무관심했던 중년층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중년층이 영웅 스토리를 즐기면서 자녀들과 함께 춤과 노래를 따라 하면서 K-컬처의 새로운 고객으로 확장되었다.
K-컬처 아래 다른 자 브랜드들도 인류 보편적 서사(권선징악의 영웅 스토리, 구속에서 탈출 스토리 등)와 결합하면 새로운 융합 콘테츠를 만들 수 있고 소비층을 넓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케데헌'의 성공이 가져온 K-팝 브랜드의 개념 확장이고 모(母) 브랜드인 K-컬처의 정교화이다. 성공적으로 확장된 중심 브랜드와 다양하게 세분화된 K-컬처는 한국의 브랜드 자산으로 한국의 소프트 파워 혹은 국가 이미지를 제고하는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K-컬처가 부상하는 현시점에서, 미국은 갑질 관세 외교로, 패권을 다투는 중국은 전량 외교로 선도 국가로서 신뢰를 상실하고 있다. 패권은 무력에만 의존하는 하드 파워로만 달성 가능한 것이 아니고 다른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따를 수 있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대개 문화 콘텐츠 전파를 통해 달성된다. 새 정부에서는 '케데헌'의 성공을 계기로 문화외 교를 통해 K-컬처를 인류 보편적 가치로 승화시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한국적 가족애, 효(孝), 이웃 간 정(情)을 탈영역화하여 인류 보편적 가치인 ‘약자와 공감’ 혹은 ‘인간애’의 의미로 재영역화해보는 것을 제안한다. 이는 정부 차원의 홍보 활동을 통해 K-컬처를 “K-공감(K-sympathy)” 혹은 “K-인간애(K-humanity)”와 같은 정신적 가치를 상징하는 개념으로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다.
김근배 숭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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