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기업 지배구조의 오랜 숙원이었던 주주 권익 강화를 위한 의미 있는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지난 7월14일, 이소영 의원 외 13인이 발의한 상법 일부개정법률안은 국내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주주가치를 제고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개정안의 핵심은 바로 '권고적 주주제안권'의 신설이다. 상장회사 발행주식총수의 0.1% 이상을 보유한 주주가 법령이나 정관을 위반하지 않는 한 주주총회의 권한이 아닌 사항에 대해서도 주주제안을 할 수 있도록 하되, 그 결의에는 법적 구속력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골자이다. 회사가 주주총회 결의를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2주 이내에 그 결정과 사유를 주주에게 통지하도록 함으로써 경영 판단의 투명성을 높이고자 했다. 또한, 기존 주주제안권의 행사 시점을 ‘주주총회일 6주 전’에서 ‘3주 전’으로 완화하여 주주의 실질적인 권리 행사를 보다 용이하게 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권고적 주주제안 제도의 도입 필요성은 학계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오래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현행 상법 제363조의2는 주주제안권을 인정하면서도, 제361조와의 해석상 주주총회 결의 사항에만 한정되는 것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로 인해 국내 주주제안은 이사·감사 선임, 현금 배당, 정관 변경 등 전통적인 안건에만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실제로 2023년 정기주주총회에서 주주제안이 제기된 회사는 전체 상장사의 약 2%에 불과했으며, 제안된 114개 안건 중 가결된 것은 9.6%에 그쳤다. 더욱이 기업가치와 직결되는 환경이나 사회적 책임 같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이슈에 대한 주주제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은 주주들이 기후변화 대응이나 기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하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국내 현실은 해외 주요국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미국은 연방 행정규칙 Rule 14a-8에 따라 주주제안이 법령이나 정관이 정한 주총 결의 사항에 한정되지 않으며, 주주제안은 개념상 '권고' 또는 '요청'의 성격을 지닌다. 이 덕분에 2023년 상반기 러셀3000 기업을 대상으로 제기된 803건의 주주제안 중 무려 482건이 환경·사회 정책에 관한 것이었으며, 이는 전체의 60%에 달하는 수치이다.
영국 역시 회사법상 주주들이 이사회에 특정 조치를 지시하는 결의안을 포함한 광범위한 사항에 대해 주주제안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또한, 총 의결권의 5% 또는 평균 £100 이상을 납입한 100명 이상의 주주가 제안할 수 있는 등 비교적 유연한 접근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유니레버, 쉘, BP 등 주요 기업들은 자발적으로 기후변화 전환 계획에 대해 3년마다 권고적 표결을 실시하며, 이를 통해 주주와의 건설적인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Say on Climate'와 같은 비구속적 투표는 비록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높은 주주 지지를 받을 경우 기업이 이를 무시하기 어려운 문화적 압력으로 작용하며, 경영진의 실제 정책 반영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
권고적 주주제안의 도입이 이사회 권한을 침해한다는 일부 우려도 제기되지만, 이는 과도한 기우로 보인다. 권고적 주주제안은 말 그대로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이사회의 경영 판단 재량권을 온전히 보장한다. 오히려 주주총회 표결을 통해 주주 의견의 강도를 파악하고, 이를 경영에 참고할 수 있는 유용한 소통 채널이 될 수 있다. 경제개혁연대 노종화 변호사가 지적했듯이, 권고적 주주제안은 ESG 관련 안건에 대한 기업과 투자자 간의 의견 차이가 소송과 같은 큰 분쟁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는 예방적 기능도 수행할 수 있다.
기후변화, 인권, 공급망 관리, 다양성 보장, 성별 임금 평등, 환경 및 사회적 위험 감독 등 ESG 이슈는 기업의 장기적 가치와 직결되는 시대적 과제이다. 주주들이 이러한 사안에 대해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제도적 통로를 마련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ESG 경영이 단순한 트렌드를 넘어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자리 잡은 지금, 주주들의 다양한 관점과 우려 사항을 경영진에게 전달할 수 있는 채널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기업 경쟁력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미국의 연구에 따르면, 권고적 주주제안이 과반 이상의 지지를 받을 경우 경영진이 실제로 이를 정책에 반영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권고적 제안이 단순히 '여론조사'에 그치지 않고, 기업 경영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신호'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열린 지배구조가 필수적이다. 권고적 주주제안의 도입은 주주와 경영진 간의 건설적인 대화를 촉진하고, ESG 경영의 실효성을 높이며, 궁극적으로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고 '코리아 프리미엄'을 창출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이소영 의원의 상법 개정안이 조속히 통과되어 한국 기업 지배구조가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며, 주주들이 기업의 진정한 동반자로서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윤태준 액트 기업지배구조연구소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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