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유지웅 기자] '무제한 한·미 통화스와프'가 관세 후속 협상의 성패를 가를 핵심 변수로 부상했습니다. 미국이 일본식 모델을 거론하며 직접투자 비중을 높이라고 압박하는 가운데, 안전장치 없이 합의가 이뤄질 경우 한국은 원화를 대거 풀어 달러를 조달해야 해 외환위기 우려까지 제기됩니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빈손으로 귀국한 지 하루 만에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으로 향했지만, 전망은 밝지 않습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스와프 없인 대미 투자 '감당 불가'…'외환보유액 84%' 잠식 우려
15일 대통령실과 기획재정부 등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한·미 관세 후속 협상 과정에서 미 재무부에 한·미 중앙은행 간 무제한 통화스와프 체결을 제안했습니다. 통화스와프는 미리 정한 환율에 따라 서로의 통화를 교환하는 제도로, 위기 상황에서 외화를 긴급 확보할 수 있는 '국가 간 외환 안전판'으로 불립니다.
일반 스와프는 협정에 교환 가능한 '총한도'를 설정하지만, 무제한 스와프는 이 제한을 없앤 형태입니다. 원화를 맡기는 만큼 달러를 반복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어, 위기 시 달러 유동성 제약을 크게 줄여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대미 투자에서 통화스와프가 중요한 이유는 펀드 규모가 한국 외환보유액 4162억달러(약 578조원·8월 말 기준)의 84%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이 펀드를 '직접 투자', 즉 현금 출자 비중을 크게 늘리는 방식으로 조성할 경우 외환보유액에서 달러를 계속 끌어와야 하고, 부족분은 원화를 대거 투입해 달러를 조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외환보유액 소진→원화 대량 투입과 환율 급등→국제 신인도 하락→외환위기'라는 연쇄 구조가 작동할 수도 있습니다. 외환보유액이 빠르게 줄면, 해외 투자자들은 "한국이 1년 이내 갚아야 하는 달러 빚인 단기외채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자금을 빼내며, 시장 불안은 증폭됩니다.
심지어 미국 측은 "자국이 원하는 곳에,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방식으로 투자하라"고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미국이 한국 외환보유액을 좌지우지하는 구조로, 우리 측 외환 운용 자율성을 크게 제약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한국 정부가 직접 투자를 5% 안팎으로 묶고, 나머지는 보증·대출 등 간접 방식으로 채우려는 것은 단순 협상 카드가 아닌 '생존 문제'라는 평가입니다.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15일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출국장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대미 투자, 원화 약세에 국고채 과잉 공급 위험"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이날 출국 직전 인천국제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지금은 공정한 결과를 만들기 위한 지난한 협상 과정"이라며 "국익에 최대한 부합하는 결과를 만들고자 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김정관 장관에 바로 이어 미국을 방문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우리 정부 입장에서는 전방위로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방미 기간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 등 통상 당국자들과 만나 후속 논의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스와프가 체결되면 외환시장은 안정될 가능성이 큽니다. 2008년 금융위기와 2020년 코로나 사태 당시에도 한·미 통화스와프가 체결되자, 원화 가치 급락은 진정됐었습니다. 다만 미국이 한국과 무제한 스와프를 맺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미국은 일본과 유럽연합(EU) 같은 기축통화국들과만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맺고 있으며, 한국과 같은 비기축통화국에는 금융위기 등 특별한 상황에서만 한시적·조건부 스와프를 맺어왔습니다.
김진욱 씨티 이코노미스트는 15일 보고서에서 "대미 투자펀드를 둘러싼 한·미 협상의 결론이 단기간에 나오기 어렵다"고 전망했습니다. 미국이 일본과의 대미 투자 합의에서 투자 기한, 미국 주도의 프로젝트 선정 절차, 2단계 이익 배분을 못 박아 한국에 예외를 줄 유인이 약하다는 분석입니다.
아울러 미국이 대만과 '빅딜'을 앞두고 있다고 밝힌 데다, 스위스와의 합의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점도 우리 요구 수용 가능성을 낮추는 불리한 요소로 꼽았습니다.
김 이코노미스트는 "대규모 대미 투자자금 조달 과정에서 원화 채권이 과잉 공급될 위험뿐 아니라, 원화 절하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3500억달러(약 485조원)의 대미 투자금이 3년 동안 미국으로 이전될 경우, 내년부터 매년 1170억달러의 자금이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앞서 "국책 금융기관에서 1년에 조달할 수 있는 외화 규모가 200억~300억달러(약 27조~41조원)를 넘기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이렇게 되면 나머지 860억~960억달러(119조~133조원)는 원화채 발행으로 메워야 하는데, 이는 연간 국고채 발행 규모의 절반을 웃도는 수준입니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이날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에서 "외환시장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 통화스와프 문제도 함께 검토하고 있다"며 "대통령 말씀처럼 국익이 훼손되지 않는 방향으로, 무리한 요구가 있다면 국익 보전을 목표로 협상해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부가 출범한 지 100일이 조금 지났고, 다른 정부가 이전부터 관세 협상을 시작한 것을 보면 '협상 장기화'라고 말하기 어렵다"며 "협상 기간과 국익이 꼭 연결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첫 한·미 담판의 장은 오는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총회가 될 전망입니다. 두 번째 분수령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참석하는 10월 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입니다. 두 무대에서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협상 장기화는 불가피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유지웅 기자 wisema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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