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전근대적 통상 강제와 신포함외교
2025-10-14 06:00:00 2025-10-14 06:00:00
신자유주의는 끝났다. 1970년대 케인즈주의의 한계를 비판하며 등장한 정부의 시장 개입 최소화 정책은 50여년 뒤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를 통한 통상의 강제화로 막을 내리고 있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쏘아 올린 패권적 관세 협정은 그간 지켜왔던 자유무역협정 원칙을 무력화했다. ‘마가’(MAGA, Make America Great Again)로 대변되는 트럼프 행정부의 ‘위대한’ 미국은 21세기형 독보적 일극 체제의 다른 이름으로 상징된다. 
 
트럼프의 행보에 거칠 것은 없다. 국제비상경제권한법에 근거한 행정명령에 서명한 트럼프는 상호관세율 변경을 위해 각국에 ‘가격표’를 통보한 상태다. 번호표를 든 EU(유럽연합), 영국, 인도, 멕시코를 비롯해 한국, 중국, 일본 등 여러 국가가 트럼프 행정부와 협상을 마쳤거나 현재 진행 중이다. 
 
트럼프의 관세 협상 특징은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 우위를 앞세운 통상 압박이다. 전후 배상금을 책정하듯 ‘묻지 마’ 배상금을 통보하고 있다. 19세기 군사적 외교 수단이었던 포함외교는 식민 지배를 강압하는 중요한 도구였다. 상대국 연안에 군함을 띄운 채 불평등한 조약을 강제했다. 약탈적 식민 지배는 ‘전근대 국가의 근대화’란 명분으로 서구 열강 중심의 국제사회에서 정당화됐다. 그렇게 제국주의 열강의 중심부 국가는 제3세계 주변부 국가를 경제적으로 수탈하고 정치적으로 종속했다. 중심부 국가의 부는 팽창했고, 주변부 국가의 저발전은 심화됐다. 
 
트럼프는 관세율 조정과 더불어 군사력 증강 정책을 펴고 있다. 미 국방부 명칭을 전쟁부(Department of War)로 변경한 건 트럼프 행정부의 호전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트럼프의 통상 협상 전략은 과거 서구 열강이 군함을 앞세워 개항을 강요한 포함외교와 상당 부분 닮아 있다. 이른바 ‘신포함외교’(Neo-Gunboat Diplomacy)다. 물론 미국의 구상대로만 글로벌 패권이 돌아가는 건 아니다. 
 
21세기 세계 질서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와 큰 차이가 있다. 주변부 국가에서 몸집을 키운 신흥 경제국의 목소리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된 것이 대표적이다. 19세기 포함외교는 ‘비문명국의 문명화’를 내세우며 다른 나라를 위협하고 종속했다. 제국주의 열강의 군함 앞에 개항의 형태를 띤 불평등 조약은 강제됐다. 자본은 이후 빠르게 팽창하며 변화했다. 그 중심에 주변부로 여겼던 신흥 경제국이 있었다. 
 
미국의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에 따르면 1970년대 동아시아의 성장은 미국의 헤게모니가 쇠퇴하기 시작하는 단계와 일치한다. 신흥공업국가(NICs)로써 중심부와 주변부 국가 사이에 위치한 반주변부 국가의 성장은 이때 나타났다. 여기에 2000년대 초반 비(非)서방 신흥 경제국의 부상은 브릭스(BRICS)란 연합체를 만들었다.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브릭스의 회원국으로 세계 질서의 다극화를 촉진했다. 
 
최근 트럼프가 브라질과의 관세 협상과 관련 꼬인 실타래를 풀기 위해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앞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트럼프의 전화를 네 차례나 거부하며 미국의 일방적 관세율 변경에 항의했다. 과거 제3세계 국가들은 서구 열강과의 힘의 우위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그러나 오늘날 준주변국으로 발전한 국가의 위상은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미국의 요구대로만 내어주진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약소국(주변국)의 위상까지 보장하는 건 아니다. 다만, 일극 체제 속에서 일방의 통상 강제에 브레이크가 될 순 있다. 그런 점에서 국제사회의 다극화는 힘의 균형을 맞춘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자본의 속성은 변화에 있다. 권력 관계를 재구성하며 수정과 발전을 거듭한다. 더 많은 부의 창출과 더 많은 권력의 집중을 위해 끊임없이 형질을 바꾸며 체제를 유지한다. 신자유주의의 내리막도 그러한 자본의 형질 변화 속에 한층 더 분명하고 교활해지고 있다. 그 항로의 끝이 어디로 향할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적어도 근대 이전 시대의 방식이나 수준은 아닐 것이다. 
 
정찬대 고려대 학술연구교수/사회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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