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화부리 무리가 물을 마시고 있다. 머리가 검은 개체가 수컷이다.
가을 하늘은 높고,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새들은 저마다 분주합니다. 참으로 치열한 시기입니다. 나무는 잎사귀를 내려놓고 열매를 새들에게 내어주며, 숲은 다가올 겨울을 준비합니다. 이 계절에 황금빛 들녘을 걷다 보면 또 다른 황금색이 눈에 들어옵니다. 밀화부리입니다.
밀화부리(Chinese Grosbeak, Eophona migratoria)는 참새보다 크고 직박구리보다는 작은, 몸길이 19cm 남짓의 새입니다. 수컷은 머리와 목이 까맣고, 암컷은 회갈색을 띱니다. 검은 날개와 흰색 띠가 선명해 비행할 때 특히 눈에 띕니다. 무엇보다 단단하고 두툼한 부리가 노랗게 빛나 어디서든 한눈에 그 특징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름 ‘밀화(蜜花)’는 꿀과 꽃이 아니라, 밀랍 같은 누런빛이 나는 보석, ‘호박(琥珀)’을 뜻합니다. 중국에서는 ‘검은 꼬리와 밀랍 같은 부리를 가진 참새’라고 부릅니다.
한국에서 밀화부리는 대체로 봄과 가을에 찾아오는 나그네새입니다. 나그네새는 말 그대로 이동 중에 잠시 머무는 새를 뜻합니다. 먼 길을 이동하는 도중 한반도에 들러 휴식하거나 먹이를 찾고, 일부는 겨울까지 머물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도시 공원이나 숲, 과수원 등에서 텃새처럼 정착하는 밀화부리도 있다고 합니다. 한반도 기후가 변하고, 먹이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되면서 굳이 먼 거리를 이동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된 것입니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새의 생활사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밀화부리 암컷이 마가목 열매를 쪼아 먹으러 가지 끝에 앉았다.
가을에 만난 밀화부리를 봄에 다시 본다면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매년 5월 초면 숲에 번식의 나팔이 울리는 시기이지요. 밀화부리 수컷과 암컷은 함께 자리를 고르고, 포플러나 산사나무 가지에 둥지를 짓습니다. 마른 풀잎과 줄기, 가는 뿌리와 가지로 단단한 그릇 모양의 집을 만듭니다. '삐릭삐릭' 맑은 소리로 지저귑니다. 그러나 이 맑고 청아한 울음소리와 독특한 부리 모양 때문에 중국 동북부에서는 관상용으로 불법 포획되기도 했습니다.
밀화부리는 환경 적응력이 뛰어난 새입니다. 저지대 활엽수림에서부터 인공 조림지, 농촌과 도시 공원까지 두루 오가며 살아갑니다. 먹이도 가리지 않습니다. 씨앗과 열매, 어린잎과 새순을 즐기고 딱정벌레와 같은 곤충도 잡아먹습니다. 튼튼한 부리로 단단한 껍질을 쪼개어 속살을 취합니다. 또한 무리를 이루는 습성이 있어 때로는 수십에서 수백 마리가 함께 평원이나 완만한 산지의 나무 사이를 옮겨 다니기도 합니다. 도시 공원의 나무 사이에서도 이런 떼 지어 움직이는 모습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무리 지어 다니는 밀화부리들이 견과류 파쇄기 같은 부리로 씨앗을 부수고 흩트리며, 그 흔적들은 숲의 순환을 이어주고 내일의 숲을 키워내는 씨앗이 됩니다. 잘 익은 곡식과 열매로 물든 황금빛 들녘처럼, 자연이 내어준 풍요가 새와 사람 모두에게 내일의 희망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글·사진= 김용재 생태칼럼리스트 K-wil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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