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안)에는 123대 국정 과제 중 38대 과제에 ‘경제성장의 대동맥, 에너지고속도로의 구축’이 포함돼 있다. 계획안에서 에너지고속도로는 재생에너지 핵심 클러스터인 호남에서 생산된 전기를 수도권 등에 보내기 위한 고압직류송전(HVDC) 망 등을 연결하는 것으로 정의됐다. 지난 10월1일에는 ‘제1차 국가기간전력망 확충위원회’가 개최돼 고압 송전선(345kV) 70개 노선과 변전소 29개 등 건설이 결정됐다. 정부는 에너지고속도로를 “전국의 산업단지 등 주요 전력 수요 지역과 재생에너지 등 발전원이 밀집된 지역을 국가 기간 전력망으로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전력 인프라”로 정의했다.
국내 전력 공급 시스템은 지역에 밀집한 석탄과 원전 등 대형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대규모 인구와 산업단지 등이 모여있는 수도권으로 장거리 송전하기 위해 국가 주도의 ‘중앙집중형’으로 오랜 기간 건설됐다. 문제는 전력 수요의 수도권 집중이 가중되면서 주요 발전과 전력 소비의 지리적 불일치가 지속됐고, 장거리 송전망 부담을 더욱 증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송전망 확충 결정은 전력 수급 불일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현 상황을 유지한 채 장거리·대용량 송전망을 대폭 늘리겠다는 구상으로 해석되었다.
현재에도 고전력 첨단산업(반도체·디스플레이·이차전지) 약 70%가량이 수도권에 집중돼 있고, 수도권 데이터센터가 전체의 60%를 차지하고 있어 충청권과 호남권의 전력이 모두 수도권으로 향하고 있다. 여기에 윤석열정부에서 허용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국가산업단지까지 조성되면 수도권 전력 집중 현상과 고압송전망 건설에 따른 지역 갈등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이미 ‘동해안-동서울 초고압직류송전망(HVDC)’ 건설사업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고, 2029년 12월 준공을 목표로 전북 서남권(2.4GW)과 전남 신안(8.2GW)의 해상풍력으로 생산된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기 위한 345kV(킬로볼트) ‘신정읍-신계룡 송전선로’ 사업도 갈등을 빚고 있다.
에너지고속도로 정책에 대해 ‘수도권 산업 보존 프로젝트’라는 비판적 시각과 ‘전국을 촘촘히 연결하는 전력망 구축’이라는 정부 주장이 맞서고 있다. 지난 9월17일 전남 나주 한전 본사에서 주민들이 서남해안 해상풍력과 태양광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수도권으로 공급하려고 추진 중인 ‘고압송전선로 구축사업’을 중단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지난 10월15일 전국 40여개 환경·시민 단체와 주민대책위원회, 지방의회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이재명정부는 윤석열정부의 잘못된 반도체 국가산단 건설 정책과 국가기간전력망 건설 정책을 이어받고 있다”며 “70개 노선의 고압 송전선(345kV)과 29개 변전소 등 3800㎞의 전력망을 건설해 전국에서 생산한 전력을 용인의 반도체 국가산업단지로 집중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전력 생산이 없는 용인에 대규모 반도체 국가산단을 지을 것이 아니라 전력 생산이 풍부한 호남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불필요한 고압송전망 건설을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재명정부는 기후위기 대응과 분산형 에너지 체계 구축, 국가균형발전을 강조하며 RE100 산업단지 조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RE100 산단은 지역에서 생산한 재생에너지를 해당 지역 산업과 주민에게 우선 공급하는 분산형 체계를 목표로 한다.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지역에 ‘지산지소(지역에서 생산한 에너지를 지역에서 쓴다)’형 RE100 산단을 조성하기 위해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포함하는 특별법을 제정해 기업 유치를 위한 분산형 모델 및 재생에너지 요금을 강구하고, 정주·교육 여건을 조성해 신도시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RE100 산단 조성 방안 마련을 위한 관계부처 합동 TF가 꾸려지는 사이 RE100 산업단지 구축 정책과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용인반도체산업단지 조성 계획은 재검토나 중단 등 어떤 논의도 없이 오히려 빠르게 진행 중이다.
환경·시민단체와 주민대책위원회, 지방의회들이 “이런 정책은 지방을 수도권의 ‘에너지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송전탑 통과 지역 주민들의 희생을 전제로 하며, RE100 시대에 반도체 기업과 경기도의 경쟁력에 역행하는 등 망국적인 수도권 집중 난개발 사업”이라며 “송전망 갈등을 줄이고 지역 균형 발전을 이루기 위해 민주적이고 투명한 논의의 장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이재명정부의 에너지 정책이 ‘기후위기 대응’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수도권 산업 보존 프로젝트’로 작동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정부가 추진하는 에너지고속도로에 대해 “‘수도권 일극주의’로 불리는 불균형 성장 전략이라는 오해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고 지적하며, “에너지고속도로란 서울로 가는 뻥 뚫린 길이 아니고, 대한민국 전국을 촘촘하게 연결하는 첨단 전력망을 말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기존 전력망이 대형 발전원(원전·화력)에서 수요처로 연결되는 ‘단방향’ 구조라면, 차세대 전력망은 지역 단위로 촘촘한 배전망을 구축한 뒤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생에너지를 인근 지역에서 사용하고 남은 전기를 다시 송전망으로 보내는 ‘양방향’ 계통을 확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 에너지 정책의 방향이 ‘지산지소’라는 것을 다시 확인한 것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재생에너지를 활용할 지역 산업 유치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전력이 필요한 기업이나 공장, 산단 등을 전력이 생산되는 곳으로 옮기는 정책이 필요하다. 이동하는 기업이나 공장에는 전기요금 인하 등 인센티브를 주고, 수도권에는 전력 소비가 큰 공장이나 데이터센터가 들어설 수 없게 하는 규제를 동시에 시행해야 가능할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재생에너지와 전력망, 국토 및 산업 계획을 통합적으로 설계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가 지역별 분산형 재생에너지 확대와 산업 전환 전략을 통합적으로 고려한 계획을 시급히 마련해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길 기대한다.
권승문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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