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임유진 기자] 채무탕감 논의가 본격화했지만, 반대 여론이 커지면서 금융당국이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채무탕감은 이재명정부가 야심차게 내건 주요 금융 정책인 만큼 이제와 무르기도 힘들어 보입니다.
3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정부가 올해 2차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추진하는 '장기 연체채권 일괄매입형 채무조정 프로그램'은 7년 이상, 신용대출 5000만원 이하로 연체된 채권을 매입해 소각하는 내용을 골자로 합니다. 개인 파산에 준하는 수준으로 상환 능력이 없는 저소득층의 경우에는 채권을 소각해 빚 부담을 없애줍니다. 채무조정 대상인 연체채권 규모는 약 16조4000억원, 수혜자는 113만4000명으로 추정됩니다. 앞서 2017년 박근혜정부 당시 장기연체 채권 매입·소각을 한 바 있지만, 정부 재원을 직접 쓴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정부의 한정적인 재원을 감안하면 금융권의 출연과 협조는 필수적인 상황입니다. 이에 따라 은행권의 긴장감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앞서 은행권은 지난 2023년 10월 '민생금융 지원방안'에 따라 2조1000억원 규모의 소상공인 금융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한 바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에도 막대한 규모의 재원을 출연금으로 내면 기업 가치(밸류업)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단 우려가 나옵니다.
채무탕감 '반대' 59%…금융당국 '난감'
채무탕감 조치가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고, 성실 상환자의 박탈감 및 형평성 논란을 재차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은 꾸준히 지적됩니다. 정부는 이미 2022년 새출발기금을 통해 한 차례 채무조정에 나선 바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채무 탕감 요구가 반복될 수 있다는 점 역시 향후 문제점으로 꼽힙니다. 새 정부 출범 초기 공약 이행과 한시적으로 운영하는 제도라는 게 금융당국의 입장이지만, 유사한 정책들이 반복될 경우 신용 질서가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됩니다.
이재명 대통령 취임 후 국정 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가 60%를 넘어선 반면, 정부가 추진 중인 채무 탕감 방안에 대해서는 다수 국민이 반대하고 있다는 여론조사도 나왔습니다.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지난달 23일부터 25일까지 사흘간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휴대전화 가상번호(100%)를 이용한 전화면접을 한 6월 4주차 전국지표조사(NBS) 결과, 코로나19 피해로 인한 소상공인 및 자영업자 채무 탕감에 '반대한다'는 입장이 59%였습니다. '찬성한다'는 입장은 37%에 그쳤습니다. (응답률은 18.3%, 표본오차는 95% 신뢰 수준에서 ±3.1%p.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채무탕감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커지자, 야권은 탕감 대상에 외국인 2000명의 채무 182억원과 도박·사행성 사업을 벌이다 발생한 자금 등 반사회적 채무까지 포함된다는 주장을 하며 비판 여론에 기름을 붓고 있습니다.
금융당국은 채무탕감이 제한적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입장을 연일 강조하고 있습니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30일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채무 소각이 모든 채무를 면제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는데 소득·재산을 심사해 상환능력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갚게 하는 게 원칙"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가능하다면 도박 관련 빚도 심사하겠다"며 "(이번 채무 조정 방안은) 정말 상환능력이 없고 생활이 안 되는 어려운 분들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언급했습니다.
금융위 관계자도 "누구나 장기 연체자가 될 수 있고, 사회 통합과 약자에 대한 재기 기회 제공 차원에서 양해를 부탁드린다"며 "파산에 준하는 수준으로 상환능력을 상실한 연체자만을 엄격하게 선별해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금융권 일부에선 이런 정부의 입장을 옹호하기도 합니다. 정부 재원으로 부실 채권을 털어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채무 불이행 기간이 7년이라면 고의적으로 연체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며 "연체가 오래된 것을 갖고 있으면, 연체율이 엄청 오르니 상각처리하는 게 낫기 때문에 금융사 입장에서도 빚 탕감으로 인한 큰 타격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금융위는 "도덕적 해이 및 성실 상환자와의 형평성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선별장치 및 신규 프로그램 등 다양한 보완 대책을 함께 마련했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금융당국과 정치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이재명 대통령의 주요 공약으로 언급된 코로나 대출 탕감·조정 방안을 구체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사진은 채무조정신청서 모습.(사진=연합뉴스)
채무조정-채무 탕감 차주 간 형평성 논란
채무조정을 받는 차주와 빚을 모두 탕감받는 차주 간 형평성 논란도 있습니다. 대출 연체정보는 7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채무조정을 받으면 그 이력이 신용정보원에 남아 금융회사들이 장기 연체자들의 채무조정 이력을 바탕으로 '신용 낙인'을 찍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반면 빚을 모두 탕감받는 사람의 경우 신용정보원에 아무 정보도 남지 않아 역차별 소지가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대규모 빚 탕감 정책이 제대로 실현되려면 '엄격한 대상 선정'과 '도덕적 해이 차단'이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아울러 금융권의 부담을 완화하면서 장기 연체자의 채권 회수보다 재기의 기회를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의견이 나옵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핵심은 '누구를, 어떻게, 어디까지 구제할 것인가'에 대한 명확하고 공정한 기준과 실행력"이라며 "빚 탕감 정책이 실질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대상 선별의 정밀함, 구조적 집행체계, 충분한 재원 마련, 그리고 금융 건전성 관리가 동시에 충족돼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요소들이 갖춰졌을 때, 단순한 탕감이 아니라 재기의 기반을 다지는 정책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임유진 기자 limyang8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의중 금융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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