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토마토 안창현 기자] 야간 택배 노동자들의 과로 사고가 반복되면서 새벽배송 금지 논란이 불거지고 있습니다. 최근 택배노조가 과로 방지 대책으로 “새벽 0시부터 5시까지 초심야시간 배송을 제한하자”는 의견을 내면서 택배 소비자들은 물론 노동계 안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새벽배송 찬반 여부에만 논의가 집중되다 보니 정작 야간노동의 위험성과 이를 규제할 대책 마련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한선범 민주노총 택배노조 정책국장은 19일 <뉴스토마토>와의 통화에서 “초심야시간 배송 제한은 반복되는 새벽배송 노동자의 과로사 사고들을 계기로 야간노동의 위험성을 줄일 수 있는 여러 방안들을 놓고 논의하자는 취지”라며 “새벽배송을 전면 금지하자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현장 택배 노동자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할 수 있는 방안들도 고민 중”이라며 “사회적 논의를 통해 야간노동이 노동자 건강에 해롭다는 명백한 사실을 고려하는 대책들이 논의돼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현재 국회에서는 민주당 을지로위원회 주도로 국토교통부와 택배업계, 노조, 시민단체들이 참여한 ‘택배 사회적대화기구’가 출범한 상황입니다. 이 자리에서 심야·휴일 배송 규제를 포함해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않는 택배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개선 논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택배노조는 지난달 22일 택배 사회적대화기구 1차 회의에서 초심야시간(0~5시) 배송을 제한하되, 오전 근무조(5시 출근)가 새벽배송이 필요한 물품을 배송하자는 방안을 내놨습니다. 노조에 따르면 쿠팡 새벽배송 노동자들은 보통 저녁 8시30분(1차), 밤 12시30분(2차), 새벽 3시30분(3차) 등 하루에 3번씩 물류캠프에 들어가 물품을 분류하고 실어 나오는 작업을 반복합니다. 그러면 야간에 3차에 걸쳐서 배송 물품을 받고, 배송하는 데 시간이 또 소요되는 겁니다. 즉, 주간배송 택배 노동자들과 비교해 하루 4번씩 추가로 배송 차량을 운행하게 되면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게 되는 셈입니다.
김병기 민주당 원내대표가 지난달 9월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택배 사회적대화기구 출범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택배 사회적대화기구까지 만들어진 건 최근 새벽배송 금지 논란이 제기되고 택배 노동자들의 과로사 사고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택배노조에 따르면 지난 2020년부터 현재까지 사망한 쿠팡 노동자만 25명, 과로사로 인정되거나 추정되는 사고는 17건에 달합니다.
지난 10일에도 제주에서 새벽배송 일을 하던 오승용씨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야간 운전 중에 전신주를 들이받고 병원에 후송됐지만 끝내 목숨을 잃었습니다. 민주노총 제주지역본부에 따르면 오씨는 저녁 7시부터 하루 11시30분씩 주 6일을 일했습니다. 법적 과로사(밤 10시부터 다음날 6시까지 노동시간은 30% 가산) 산정 기준으로 따지면 83.4시간이나 됩니다.
쿠팡의 배송전문 자회사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CLS)에서 택배기사로 일하다 지난해 5월 숨진 고 정슬기씨의 경우, 근로복지공간에서 과로사로 인한 산업재해 인정을 받았습니다. 정씨가 사망한 이후 생전의 그가 빠른 배송을 재촉하는 쿠팡CLS 측에 “개처럼 뛰고 있긴 해요”라는 메시지를 보낸 사실도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근로복지공단이 작성한 정씨의 업무상질병판정서를 보면, 정씨는 숨지기 전 1주일 동안 74시간24분을 일하고 12주 평균 73시간21분 일했습니다. 고용부 고시 기준은 12주 동안 평균 60시간, 4주 동안 평균 64시간을 넘는 경우 업무와 질병과의 관련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당시 공단도 “주 6일 고정 야간근무를 수행한 것으로 확인되는 점, 육체적 강도가 높은 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판단되는 점, 배송 마감 시간으로 인한 정신적 긴장 상태로 업무상 부담이 가중됐을 것으로 판단되는 점” 등을 들어 산재를 인정했습니다.
택배노조 관계자는 “새벽배송에서 가장 위험한 시간대의 배송 업무를 제한하면 노동자에게 최소한의 수면 시간과 건강권을 보장할 수 있다”며 “밤 12시 이전과 새벽 5시 이후 배송은 계속된다. 특히 아침 일찍 받아야 하는 긴급한 품목에 대해선 품목 사전 설정 등을 통해 기존처럼 받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방안”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서울 송파구 동남권물류센터에서 한 택배기사가 택배 상자들을 정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다만 현장 택배 노동자들은 고용 안정과 임금 보전 등을 이유로 건강보다는 차라리 새벽배송을 더 선호하는 게 현실입니다. 쿠팡 위탁 택배기사 1만여명이 모인 쿠팡파트너스연합회(CPA)는 지난 3일 소속 택배기사 2405명을 대상으로 한 긴급 설문조사를 통해 응답자 93%가 새벽배송 금지에 반대하는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또 95%는 심야시간대 배송을 계속하겠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실제로 쿠팡의 직고용 배송기사 노조인 쿠팡친구노동조합도 지난달 30일 입장문을 내고 “(택배노조가) 택배 노동자들의 현실과 실상황을 외면한 채 새벽배송 금지를 제안했으나 이로 인한 고용 안전과 임금 보전은 누가 책임질 것이냐”며 “국회와 정부는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대안을 논의하라”고 촉구했습니다.
한국노총은 ‘야간 작업시간 주 최대 50시간 이내 제한’과 ‘야간배송 택배기사 주 5일 근무제 도입’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택배 사회적대화기구에 참여한 하충효 한국노총 대외협력본부장은 “노동자 건강권을 최우선으로 여러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며 “초심야시간 배송이 제한될 경우, 새벽배송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있어 야간 작업시간 제한과 주 5일 근무제 도입 등 점진적인 개선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노동자 건강권에 대한 대책이 미흡,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강민욱 택배노조 쿠팡본부준비위원장은 “쿠팡 새벽배송 노동자들은 보통 저녁 9시 정도에 출근해 오전 7시까지 심야노동을 한다”며 “과로사 산재 판정 기준이 주당 60시간인데, 이를 기준으로 하면 새벽배송의 경우 주 5일 근무 시 62시간, 주 6일 근무 시에는 74시간을 넘는다”고 했습니다.
이어 “지난해 쿠팡CLS는 과로사 위험을 낳는 장시간 노동 시스템을 개선하기로 약속했다”면서 “현장에선 여전히 상시적 고용 불안 속에서 분류 작업과 마감 시간 준수, 수행률 압박을 받으며 장시간 고강도 노동을 부추기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안창현 기자 chah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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