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ESG 공시, 선언의 시대를 넘어 책임의 시대로
2026-02-19 06:00:00 2026-02-19 06:00:00
ESG가 자본시장의 자율적 선택이나 기업의 선의에 기대던 '선언'의 시대를 지나, 법적 책임과 정량적 증명을 요구하는 '공시 제도화'의 시대로 급격히 전환되고 있다. 특히 2026년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공시 기준들이 수렴되고, 기업의 지속가능성 정보가 재무제표에 준하는 신뢰성을 확보해야 하는 전환의 원년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거대한 흐름 속에서 글로벌 규제 지형의 변화를 분석하고, 공시 의무화를 앞둔 한국이 취해야 할 전략적 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매우 시급한 과제다.
 
현시점 글로벌 ESG 공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규제의 ‘조정’과 ‘심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유럽연합(EU)은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과 공급망실사지침(CSDDD)의 적용 범위를 조정하며 속도 조절에 나섰다. 그러나 이는 규제의 후퇴가 아니라 실현 가능한 수준으로의 정교화로 해석해야 한다. 한편 미국에서는 연방 차원의 규제가 정치적·법적 도전에 직면한 가운데, 캘리포니아 기후공시법이 스코프(Scope) 3 배출량을 포함한 광범위한 공시 의무를 부과하며 사실상의 국가 표준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ESG 공시가 더 이상 선택적 공표가 아닌, 자본시장의 정보 비대칭성을 해소하기 위한 필수 인프라로 안착했음을 보여준다.
 
혼재되어 있던 공시 기준의 지형도 빠르게 정리되고 있다.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가 제정한 IFRS S1과 S2는 글로벌 공시 프레임워크의 기준선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미 40개 이상의 주요 관할권이 ISSB 기준을 전면 도입하거나 참조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기업들은 과거 GRI, TCFD, SASB 등 다층적 공시 요구에 각기 대응하던 소모적 방식에서 벗어나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제는 ‘단일 진실 공급원(Single Source of Truth)’에 기반한 데이터 통합 관리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특히 EU의 유럽지속가능성보고기준(ESRS)과 ISSB 간 상호운용성 확보를 위한 기술적 연계가 지속되면서, 기업의 ESG 데이터는 국경을 넘어 투자자들에게 동일한 기준으로 비교 가능한 분석 대상이 되었다.
 
공시 내용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감지된다. 가치사슬 전체를 관통하는 스코프 3 배출량 공시가 정밀화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추정치에 의존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협력업체의 실측 데이터 수집이 요구되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정보 공개를 넘어 실질적인 경제적 비용으로 전이되고 있다. 특히 2026년부터 본격적인 과세 단계에 진입하는 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ESG 공시 데이터가 관세 산정의 직접적 근거가 됨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공급망 내 중소·중견기업들의 데이터 산출 역량이 모기업의 원가 경쟁력과 직결되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이와 함께 데이터의 신뢰성 확보를 위한 검증 의무화도 글로벌 공시 제도화의 핵심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CSRD와 캘리포니아 법안이 요구하는 제3자 검증은 초기 ‘제한적 확신’에서 향후 ‘합리적 확신’ 수준으로 강화될 예정이다. 이는 공시 오류가 단순한 기재 정정을 넘어 법적 소송과 징벌적 배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그린워싱 리스크’를 제도적으로 통제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다. 따라서 기업은 이제 보고서의 수사적 완성도가 아닌, 내부 통제 시스템의 견고함을 입증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러한 글로벌 공시 패러다임의 변화는 한국의 공시 제도 설계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먼저 글로벌 기준인 ISSB와의 정합성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되, 국내 제조업의 특수한 구조를 반영한 단계적 이행 로드맵을 구축해야 한다. 특히 수출 중심의 산업구조를 고려할 때, 공급망 내 중소기업들이 데이터 산출 역량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적 지원은 단순한 규제 대응을 넘어 국가 공급망의 회복탄력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아울러 공시를 행정적 부담이 아닌 자본 효율성 제고의 기회로 전환하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사회와 경영진은 ESG 데이터를 재무 리스크 관리의 핵심 지표로 통합하고, 이를 전략적 의사결정의 근거로 활용하는 지배구조의 질적 고도화를 실현해야 한다. 글로벌 공시 장벽이 높아지는 2026년 이후의 환경에서 데이터의 신뢰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기업만이 자본의 효율적 배분을 이끌어내며 지속 가능한 성장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공시 의무화라는 파고를 넘어서는 힘은 규제에 대한 수동적 순응이 아닌, 투명한 정보를 통해 시장의 신뢰를 획득하는 본연의 경쟁력에서 창출된다.
 
윤태준 한국ESG연구소 거버넌스본부 팀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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