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 일반적으로 태국과 베트남을 떠올리게 합니다. 온화한 기후 탓에 전 세계 최고의 휴양 국가이자 관광 국가로 알려진 곳입니다. 하지만 이들과 맞닿아 있는 인도차이나반도 유일의 내륙 국가 '라오스'. 낯선 만큼 모든 것이 어색하지만 그 속살을 살펴보면 의외로 우리와 많은 부분이 통할 수 있을 것 같은 친숙한 곳이기도 합니다. 뉴스토마토 K-정책금융연구소의 글로벌 프로젝트 '은사마'가 주목하는 해외 거점 국가 라오스의 모든 것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1. 2023년 태국 총선
2023년 5월14일 실시된 총선 결과는 대이변이었다. 분석가들은 반군부 진영 승리를 예상했으나, 엑(본명 '타나톤 쯩룽르앙낏')이 이끌었던 진보정당의 후예인 먼걸음당이 탁신계 타이를위한당(PT)을 압도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방콕의 33개 지역구에서 먼걸음당은 32석을 차지했고, PT는 1석을 얻는 데 그쳤다. PT로서는 뼈아픈 결과였다. 탁신의 출신지로 확고한 지지 기반이었던 치앙마이에서도 7대2로 밀려버렸다. 먼걸음당은 왕당파 외에는 단 한 번도 반군부 진영의 의원을 허용한 적이 없던 푸켓에서도 3석 모두를 차지했다.
2023년 총선은 19번째 군부쿠데타와 18번째 헌법 아래 정치에 체념적이던 유권자들이 대거 투표장으로 나서 75.22%라는 역사상 유례없는 투표율을 기록한 '선거 혁명'이었다. 진보정당의 2대 당수로 기념비적 승리를 이끈 피타 림짜른랏(별명 '팀')은 단숨에 유력한 수상 후보로 떠올랐다.
주류 독과점을 반대하는 활동가이자 재선 의원인 '타오'는 수제 맥주 제조업자기도 하다. (사진=타오 페이스북)
2. 최고 '범생이' 팀
1980년 방콕 출생. 팀의 증조부는 중국계 불법 이민자였으며 림짜른랏의 '림'은 중국 성씨(林)에서 비롯되었다. 아버지는 쌀겨와 배아에서 추출한 미강유를 생산하는 농산물 회사의 주인이었다. 팀은 11살 때 뉴질랜드 해밀턴으로 건너가 세인트존스 칼리지에서 중등교육을 받았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면서 교육 여건과 환경이 좋고 비용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도시였다. 팀의 아버지는 한 세대 이전에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팀은 중산층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하면서 정치에 눈을 떴다.
"제가 홈스테이 하던 가정에서 볼 수 있는 채널은 두 개뿐이었어요. 한쪽은 연속극, 다른 쪽은 시사 프로그램이었죠. 연속극은 싫어해서 당시 수상이던 중도우파 짐 버거 수상의 연설을 즐겨 들었습니다."
팀은 이후 태국으로 돌아와 타마쌋대학 상경대학에서 금융학을 전공했고, 최우등으로 졸업해 텍사스 오스틴대 장학금을 받았다. 이어 하버드에서도 국제학생장학금을 받은 첫 태국인이 되었으며, 2011년 하버드 케네디스쿨에서 행정학 석사, MIT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했다. 재학 중에는 보스턴컨설팅그룹에서 컨설턴트로 활동했다.
3. 1등 신랑감
아버지의 별세로 회사가 유동성 위기에 빠지자, 팀은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경영을 맡았다. 2년간의 활약이 결실을 거두어 회사는 안정을 되찾았다. 팀은 은행에서 170만바트를 빌려 빚을 상환하고 수십억 바트의 수익을 남겼다. 가족들은 회사가 안정됐다고 판단해 팀이 미국으로 돌아가 학업을 이어가는 데 동의했다.
2008년 태국판 여성 잡지 CLEO는 팀을 '50인의 뛰어난 총각' 중 하나로 선정하고 표지 모델로 삼았다. 수려한 외모에 더해 학력과 사업 수완까지 갖춘 '1등 신랑감'이었다. 석사 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팀은 가업에 복귀하지 않고, 캐나다에 본사를 둔 수산업 회사에서 태국법인장으로 일했다. 팀이 정치로 뛰어들기 전 마지막 경력은 차량 공유 기업 '그랩(Grab)'의 대표였다.
4. 국민 사위
팀은 2008년부터 '따이'라는 예명으로 알려진 배우와 연애 끝에 결혼해 딸을 두었으나 2019년 이혼했다. 따이는 이혼 당시 가정 폭력으로 팀을 제소했으나 법원은 증거 불충분 판결을 내렸다. 따이는 다른 이혼 사유로 팀이 '독재적'이라고 주장했다. 게이·레즈비언 등 성소수자를 만나지 못하게 하고 미국 남성 배우와의 우연한 만남을 의심했으며 귀가 시간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따이 문명권에선 일반인 사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태국 진보정당에는 성소수자의 권리를 외치는 활동가들이 초기부터 대거 참가했으므로, 당수의 이혼 사유로선 뜻밖이었다. 2015년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피핌'에 대해 법원은 공동 양육권을 인정했고, 피핌은 팀이 맡아 기르기로 했다.
따이인 사이에서 팀은 어떤 인물로 보일까? '제가(齊家)도 못한 사람이 어찌 평천하(平天下)를 논하겠느냐' 같은 유교적 편견은 따이 문명권에 없다. 이혼 시 자식 부양에 대한 법적 책임을 나누어지는 것은 타국과 다를 바 없지만, 따이 문명권에서는 자식들을 돌보는 것은 어머니의 몫이 되는 것이 상례이다. 어머니가 전적으로 부양을 책임지고, 외할머니가 손자녀의 보호자가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엑이 뭇 여성들에게 '대디'라면 팀은 1등 신랑감이었다. 이혼 후 따이의 장인·장모들에게 팀은 책임감 있는 국민 사위로 보였을 수도 있다.
5. 거의 수상
팀은 태국 제1당의 대표로서 내각을 구성할 수 있는 대표성을 갖게 되었다. 탁신계의 PT를 비롯한 8개 정당 연합인 피타는 23개 정책에 합의하고 정부 구성을 위한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여기에는 제헌의회를 통한 새 헌법 초안 작성, 군 개혁, 자발적 징집제, 동성 결혼 합법화, 경제 분권화 등이 포함됐다. 다만 집권을 위해 먼걸음당의 공약이었던 형법 112조(불경죄·왕실모독죄) 개정안은 제외됐다.
팀은 결국 수상이 되지 못했다. 수상이 되려면 상·하원 750표 중 과반(375표)이 필요했으나 324표를 얻는 데 그쳤다. 2024년까지 쿠데타 세력의 통치 기구인 국가평화유지위원회가 상원 250명을 지명하게 되어 있었으니 도리가 없었다.
팀과 먼걸음당의 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선거관리위원회와 헌법재판소는 바쁘게 움직였다. 팀은 상장폐지된 언론사 주식을 상속했다는 이유로 의원 직무정지 처분을 받았고, 당의 공약인 왕실모독죄 개정은 불법이자 군주제 전복 시도로 판결했다. 이 판결로 인해 2024년 8월7일 당은 해산되었고, 팀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은 10년간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6. 판박이
진보정당의 3대 당수인 나타퐁(별명 '텡')이 난 지역의 수해 복구 지원 활동 중이다. (사진=나타퐁 페이스북)
초대 당수인 엑의 새로운미래당과 2대 당수 팀의 먼걸음당은 같은 운명을 겪었다. 당의 해산과 10년간의 정치활동 금지. 남은 143명의 의원들은 의석 없는 '독수리당'에 입당해 두 번째 환생이자 세 번째 정치적 생명을 이어갔다. 3대 당수로는 1987년생 기업가 출신의 채식주의자 재선 의원 나타퐁 르앙빤냐웃티(별명 '텡')가 선출되었다.
인민당의 다음 총선 목표는 단독 집권이다. 최근 여론조사 기관 니다(NIDA)가 발표한 인민당 지지율은 46.08%로 압도적 1위를 달리고 있다. 양당제에서도 기록하기 어려운 숫자다. 텡은 수상 선호도 31.48%로 역시 1위를 달리고 있다.
텡과 인민당은 차기 집권에 성공할 수 있을까? 실각한 전 수상 탁신의 막내딸 패통탄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죠. 여긴 태국이잖아요!"
라오스=프리랜서 작가 '제국몽'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자본시장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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