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디테일에"…화약고 '반도체·비관세'
반도체 관세, 문서 반영 '불투명'
'농산물 추가 개방' 요구 가능성
2025-11-02 18:00:51 2025-11-02 18:00:51
[뉴스토마토 유지웅 기자] 한·미가 관세 협상에 합의했지만, 핵심인 반도체는 당초 언급됐던 '최혜국(MFN) 대우'에서 '대만 수준'으로 낮아졌습니다. 이마저도 팩트시트(설명자료) 등에 반영되지 않을 가능성이 커졌고, 농산물 시장 개방 문제도 여전히 안갯속입니다. 협상의 성패는 이런 세부 조항이 '문서에 어떻게 담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모호한 '상업적 합리성'에…일본식 '자문 위원회' 구조
 
김민석 국무총리는 2일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배경훈 과학기술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관계부처 장관이 참석하는 '3+알파(α) 회의'를 주재했습니다. 한·미 관세 협상 타결에 따른 후속 대응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 자리에서는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의 발언이 거론됐을 것으로 보입니다. 러트닉 장관이 '반도체 관세는 합의의 일부가 아니며, 한국은 시장 완전 개방에 동의했다'고 밝힌 데 대해 우리 정부는 "정치인의 언어는 정치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자국 유권자에게 협상 성과를 부각하기 위해 과장된 표현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협상 성과를 내세우는 과정에서 굳이 '반도체'를 콕 집어 "합의 대상이 아니었다"고 강조할 이유는 사실상 없습니다. 이는 대만과 한국의 경쟁 구도를 이용, 대미 투자처 선정 과정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한국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한 포석일 수 있습니다.
 
실제 러트닉 장관은 '마스가'(한·미 조선업 협력 프로젝트)를 제외한 한국의 대미 투자금 2000억달러(약 286조원)을 두고 "알래스카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에너지 기반시설, 핵심광물, 첨단 제조업, 인공지능(AI), 양자컴퓨터 분야에 투자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투자 프로젝트 선정에 우리 의견이 반영되는 구조를 만들었다"는 정부 설명이 무색해지는 대목입니다. 한·미 양국은 프로젝트 선정을 위해 러트닉 장관이 위원장을 맡는 '투자위원회'와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는 '협의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미·일 양해각서(MOU)에도 유사한 방식의 투자위원회·협의위원회 설치가 규정돼 있습니다. 일본은 협의위를 통해 '자문' 형태로 투자에 참여할 뿐, 투자처 최종 승인 권한은 사실상 미국이 쥐는 구조입니다.
 
한국이 명시하기로 한 '상업적 합리성'이 실질적으로 작동할지도 미지수입니다. 표현에 구체성이 떨어지는 탓에 양국이 각자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이를 해석할 여지는 충분합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반도체 관련 사항은 조만간 발표될 '조인트 팩트시트'(양국이 합의 내용을 정리한 문서)에 명확히 반영돼 있다"고 설명했지만, 해당 문서의 정확한 발표 시점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반면 유럽연합(EU)은 반도체 관세에서 상호관세율(15%)을 초과해 부과받지 않도록 미국과 합의했고, 일본은 사실상 최혜국대우에 준하는 대우를 받기로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러트닉 상무장관이 지난 4월 행정명령에 서명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농산물 개방 불씨 '여전'…MOU 확정 시기 '미지수'
 
앞서 미국은 지난 7월 한국과 '큰 틀 합의'를 이뤘을 때도, 반도체 관세 부과와 관련해 한국에 최혜국 대우를 약속했지만 말뿐이었습니다. 한국이 '농산물'을 포함해 시장을 완전히 개방하기로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었습니다. 
 
당시 우리 정부는 "대미 투자 3500억달러 대부분은 대출과 보증"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미국이 현금 투자 비중을 늘리라고 요구했고, 결국 이 요청을 일정 부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농축산물 시장 개방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은 매년 국가별 무역장벽보고서(NTE)를 통해 한국에 쌀·쇠고기 등 농산물 시장 개방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그간 자국 농산물 수출에 '진심'이었습니다.  
 
일본뿐 아니라 영국, 베트남, 인도네시아와의 협상에서도 농산물 시장 개방은 핵심 의제로 다뤄졌고, 대부분 국가에서 일정 수준의 양보가 이뤄졌습니다. 대통령실은 "이미 99% 이상이 개방돼 있고, 러트닉 장관이 이런 점을 표현한 것 같다"고 해명하지만, 이런 메시지를 단순 '대내 선전용'으로만 볼 수는 없다는 지적입니다. 
 
정부 내부에서는 "양측 합의에 따른 문서가 이미 마무리 검토 단계인 만큼, 미국 측 발언을 불필요한 논란으로 확대하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문제는 '물증'이 없다는 점입니다. 미국 측이 협상장 안팎에서 말을 달리해온 전례를 감안하면, 추가적인 농산물 시장 개방을 요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 경우 전체 합의가 다시 교착 국면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양국이 합의 이후에도 이견을 드러내면서, MOU 문안이 확정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앞서 7월 협상이 타결된 뒤 이번 합의까지 3개월이 걸렸다는 점에서, 아직 긴장을 풀 수 없습니다.
 
유지웅 기자 wisema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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