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ECD 과학·기술·혁신 전망 2025' 보고서 표지. (사진=OECD)
[뉴스토마토 임삼진 객원기자] 세계의 과학기술정책이 ‘안보’의 틀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경고가 나왔습니다.
OECD의 새 보고서는 지정학적 환경 변화가 과학·기술·혁신 정책을 재편하고 있다고 밝히고, 신흥 핵심 기술에 대한 지정학적 긴장과 안보 우려가 과학·기술·혁신(STI) 분야의 국제 협력을 재편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8일 발표한 보고서 ‘OECD 과학·기술·혁신 전망 2025(Science, Technology and Innovation Outlook 2025)’는 각국 정부가 핵심 연구 및 신흥 기술 촉진부터 무단 지식 유출 방지, 과학 외교를 통한 국가 이익 투사까지 STI 정책을 경제·국가 안보 목표에 점점 더 부합시키는 추세가 뚜렷해지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OECD는 “떠오르는 기술의 전략적 가치가 높아지면서 STI 정책의 안보화(securitisation)가 가속되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즉, 과학과 기술이 더 이상 ‘국제 공공재’만이 아니라 ‘국가이익을 투사하는 수단’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연구보안 정책, 7년 새 10배 증가
보고서에 따르면, 연구 보안(Research Security) 관련 정책 수는 2018년 25건에서 2025년 250건으로 늘었습니다. 정책을 시행 중인 국가 수도 같은 기간 12개국에서 41개국으로 급증했습니다. 이는 “민감한 연구를 보호하고 외국의 간섭을 차단하기 위한 각국의 제도적 대응이 폭발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티아스 코만(Mathias Cormann) OECD 사무총장은 “너무 느슨한 보안은 지식 유출 위험을, 너무 강한 통제는 혁신의 숨통을 죄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부는 위험에 비례한(proportional) 수준의 정책을 설계해야 하며, 개방적 협력 속에서도 국가이익을 지킬 수 있는 정밀한 균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과학의 개방성, 다시 시험대에 올라”
OECD는 과학의 개방성이 후퇴하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1970년 OECD 회원국의 국제 공동 저자 논문 비율은 2%에 불과했지만 2023년에는 27%까지 늘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 상승세가 멈추고 있습니다. 국가 간 협력이 지정학적 이유로 제한되고, 과학의 ‘국제 언어’였던 공동연구가 점차 단절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고서는 “지나친 보안 강화가 연구 품질 저하와 협력 단절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대신 “보안정책은 과학자, 기업, 정부가 함께 설계해야 한다”라며
정책이 정확하고 협력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에너지·국방 R&D 급증…‘전략기술’ 중심으로 이동
OECD의 분석은 ‘자원의 이동’을 뚜렷이 보여줍니다. 지난 10년간 에너지 분야 공공 R&D 투자는 76% 증가했고, 국방 연구개발 예산은 같은 기간 75% 늘었습니다. 이는 전체 R&D 성장률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입니다. 또한 인공지능(AI)과 양자기술, 반도체 등 ‘핵심 전략기술’에 대한 집중투자는 더욱 거세지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제 공동연구의 투명성과 개방성은 ‘국가 안보’라는 명목 아래 검열과 감시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효율과 민주성의 재설계 필요”
OECD 보고서의 핵심 메시지는 급변하는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과학기술정책의 구조 자체를 재설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OECD가 제시한 7대 개혁 방향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책 간 시너지 강화(Policy complementarities) ▲연구보안의 정밀화(Proportionate research security) ▲혁신의 확산(Diffusion and inclusion) ▲공공과학의 개혁(Multidisciplinary & open science) ▲기술 융합(Technology convergence) ▲
산업생태계 접근(Ecosystem approach) ▲ 정책 민첩성(Policy agility & experimentation)
“안보가 혁신의 언어를 잠식하지 않게 해야”
2024년 OECD 지역 내 정부 연구개발(R&D) 연간 배정액이 1.9% 감소했음을 밝히고, 이에 따라 STI 정책은 의도적으로 시너지를 활용하고 서로 다른 정책 우선순위 간의 상충관계를 완화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또한 OECD는 “보안과 혁신의 관계를 ‘제로섬’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과학의 개방성을 유지하면서도 기술 주권을 확보하는 균형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공공과학의 역할을 재정의하며, “시민과의 소통과 참여(Citizen Science)를 강화하고 다학제적 연구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최근 국내에서도 ‘기술유출 방지’, ‘산업기밀 보호’ 등의 이름으로 연구자 간 교류가 위축되는 현상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OECD는 이런 접근이 장기적으로 혁신 역량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보안 강화’보다 ‘신뢰 회복’, 즉 개방적 협력과 투명한 연구 생태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닫힌 연구는 더 이상 혁신을 낳지 않는다”라는 OECD의 메시지는 단호합니다.
정책의 민첩성과 협력의 회복만이 불확실한 시대의 혁신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OECD는 정부가 정책실험(policy experimentation)을 제도화하고, 성공적 사례는 확장하고, 실패한 정책은 단계적으로 철회하라고 권고합니다. 이 같은 ‘학습하는 정부’만이 빠르게 변하는 기술 환경에 대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OECDsms “과학의 자유를 보장하고 개방을 유지할 때 인류는 공동의 위기를 함께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현실에서 적용하기 쉽지 않은 메시지임에도 불구하고 ‘안보를 이유로 닫힌 연구는 더 이상 혁신을 낳지 못한다’는 경고와 함께 결코 풀기 쉽지 않는 난제를 던집니다. 분명한 것은 과학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인류 공동의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진행 중인 연구보안 이니셔티브 수. (사진=OECD)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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