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임삼진 객원기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2기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 과학계는 초유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미 국립보건원(NIH)은 이미 승인된 20억 달러 규모의 연구비를 취소했고, 국립과학재단(NSF)은 1400개 이상의 연구 과제를 중단시켰습니다. 내년도 예산안은 비국방 분야 연구개발(R&D)을 무려 36% 삭감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다이어트 약 오젬픽을 개발하는 데 영감을 준 미국 도마뱀 길라몬스터. (사진=미국 National Park Service)
하버드대 존 홀드런(John Holdren) 교수는 “정부가 중간 단계에 있는 수많은 연구를 통째로 없애고 있다”며 “이제는 예산 삭감으로 그 방향을 고착화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타격을 입는 분야는 ‘기초연구(basic research)’, 즉 당장의 상업적 응용이 없는 ‘순수 과학’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이런 ‘쓸모없어 보이던 연구’가 결국 인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라며 10월29일 네이처(Nature) 피처 기사는 세상을 바꾼 7개의 기초과학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① 뜨거운 온천에서 시작된 DNA 혁명 - PCR의 탄생
1966년 여름, 미국 인디애나대학의 학부생 허드슨 프리즈(Hudson Freeze)는 스승 토머스 브록(Thomas Brock) 교수와 함께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뜨거운 온천수를 떠다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70℃에서도 살아남는 세균 테르무스 아쿠아티쿠스(Thermus aquaticus)를 발견했습니다. 이 세균에서 분리된 ‘Taq 중합효소(Taq polymerase)’는 훗날 DNA를 대량 복제하는 PCR(중합효소 연쇄반응) 기술의 핵심으로 쓰입니다. 지금은 코로나19 진단부터 법의학 DNA 감식, 암 진단까지 PCR 없는 생명과학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② 핵물리학이 낳은 ‘인체 스캐너’ — MRI
1930년대 이시도어 라비(Isidor Rabi)는 원자핵의 ‘스핀(spin)’을 연구하던 물리학자였습니다. 그는 자기장 속에서 핵이 회전 방향을 바꿀 때 생기는 공명현상, 즉 핵자기공명(NMR)을 발견했습니다. 당시엔 ‘순수 물리학의 장난감’이라 불렸지만, 수십 년 후 이 기술은 자기공명영상(MRI) 으로 발전했습니다. 방사선을 쓰지 않으면서도 인체의 심장·뇌·암세포를 정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20세기 의학의 가장 위대한 도구가 된 것입니다.
③ 당근 뿌리에서 평면TV까지 - 액정의 기적
1888년 프라하의 식물학자 프리드리히 라이니처(Friedrich Reinitzer)는 당근 뿌리에서 추출한 콜레스테롤 유도체가 이상한 현상을 보인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고체가 녹으면서도 색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독일의 오토 레만(Otto Lehmann)은 이를 분석해 ‘액정(liquid crystal)’ 이라는 새로운 물질 상태를 제시했습니다. 반세기 동안 무용하다고 여겨졌던 이 연구는 1960년대 미국 화학자들에 의해 되살아나, 오늘날 평면TV와 스마트폰 화면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의학 도구가 된 MRI(자기공명영상)은 발견 당시 '물리학의 장난감' 취급을 받았다. 사진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머리에 키스를 한 뒤 여자 아이의 뇌종양 크기가 줄었다는 주장이 나와 화제가 된 MRI. (사진=뉴시스)
④ 짠물 속 미생물이 만든 혁명 - CRISPR 유전자 가위
1989년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모히카(Francisco Mojica)는 한 소금호수에서 사는 미생물을 연구하다 반복된 DNA 배열을 발견했습니다. 처음에는 ‘쓸모없는 유전자 잔재’로 여겨졌지만, 그는 이 배열이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일종의 ‘면역 기록’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후 에마뉘엘 샤르팡티(Emmanuelle Charpentier)와 제니퍼 다우드나(Jennifer Doudna)가 이를 활용해 CRISPR 유전자 편집 기술을 완성했습니다. 인간의 유전 질환을 치료하고, 농업과 의학을 뒤흔든 현대 생명공학의 초석을 쌓은 것입니다.
⑤ 도마뱀 독이 낳은 다이어트 약 - 오젬픽
세계적인 다이어트 약 오젬픽(Ozempic)은 미국 사막 도마뱀 ‘길라몬스터(Gila monster)’의 독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1980년대 인체 장내 호르몬 GLP-1이 인슐린 분비를 자극한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수명이 너무 짧아 약으로 쓰기 어려웠습니다. 1992년, 뉴욕의 연구진이 길라몬스터의 독에서 발견한 Exendin-4가 GLP-1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이를 기반으로 제2형 당뇨와 체중감량 치료제가 탄생했습니다. 오늘날 GLP-1 약물 시장은 2030년까지 1000억달러(약 138조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⑥ 보랏빛 꽃에서 시작된 RNA 치료제
1990년 미국의 리처드 요르겐슨(Richard Jorgensen)은 보라색 페튜니아(Petunia) 꽃의 색을 진하게 만들기 위해 색소 유전자를 추가했으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꽃이 하얗게 변한 것입니다. 이 ‘이상 현상’은 세포가 불필요한 유전자를 RNA 간섭(RNA interference) 으로 침묵시킨다는 사실로 이어졌고, 이 원리를 바탕으로 혈우병 등 난치병 치료제가 탄생했습니다.
⑦ 지구의 나이를 잰 과학자, 대기오염을 없애다
1950년대 지구화학자 클레어 패터슨(Clair Patterson)은 우라늄의 납 동위원소 비율을 이용해 운석의 나이를 측정했습니다. 그 결과, 지구의 나이를 45억 5천만 년으로 확정했습니다. 하지만 실험 과정에서 그는 납 오염이 모든 시료를 더럽히고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추적 끝에 범인은 유연휘발유였습니다. 패터슨은 업계의 거센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이를 폭로했고, 결국 납 휘발유 전면 금지로 이어져 인류의 건강을 구한 숨은 영웅이 되었습니다.
“가장 느리지만 가장 확실한 투자, 기초과학”
하버드대 존 홀드런 교수는 “기초연구에 투자한 1달러는 사회 전체에 수 달러의 이익을 돌려준다”며 “민간 기업이 하지 못하는 일을 정부가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위에 소개한 사례들은 모두 정부가 ‘쓸모없다’며 외면했을지도 모를 기초과학의 씨앗들이었습니다. 과학의 나무는 당장은 그늘을 만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세월이 흐르면 거대한 숲이 됩니다. 지금, 미국이 자르고 있는 것은 예산이 아니라 미래 그 자체라는 네이처의 경고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임삼진 뉴스토마토 객원기자isj2020@daum.net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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