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철강업계가 기후위기로 이중고를 겪고 있습니다. 탄소 감축 점수 ‘낙제’에 글로벌 규제 압박에 직면해 있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행동연구소와 기후넥서스가 3일 발표한 ‘철강기업 기후행동평가 2025’ 보고서에 따르면, 주요 철강사의 온실가스 감축 노력이 전반적으로 ‘매우 미흡’하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자동차·건설·조선 등 제조업 전반의 기반인 철강기업이 환경 전환 없이 존립하기 어려운 구조로 재편되고 있지만, 국내 대응은 여전히 뒤처져 있다는 것입니다.
국내 한 제철소에서 방열복을 겹쳐 입은 노동자들이 작업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온실가스 1억톤 배출, ‘우수’ 기업 전무
이번 평가는 포스코, 현대제철, 동국제강, 세아베스틸 등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 100만톤 이상 철강사 네 곳의 지난 5년간(2020~2024년) 이행 실적을 분석한 것입니다. 이들의 연간 배출량은 총 1억234만톤, 국내 전체 배출량의 14.8%를 차지합니다. 그럼에도 평가 결과 ‘우수’(80점 이상)로 분류된 기업은 없었습니다.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세아베스틸조차 100점 만점 중 64점(‘보통’)에 그쳤고, 동국제강은 51점, 포스코는 48점으로 ‘미흡’ 평가를 받았습니다. 현대제철은 최하위인 39점으로 ‘매우 미흡’ 수준이었습니다. 평가 항목은 책임성·효과성·효율성·적극성·투명성·철강 업종 특성 등 6개 영역이었습니다.
특히 우려스러운 점은 국내 철강 기업의 온실가스 집약도(철강 1톤당 발생 CO₂량)가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했다는 것입니다. 현대제철은 5년간 집약도가 7.4% 상승했습니다. 전기로 비중이 줄고 고로 생산 비중이 늘어 조강 생산량이 줄었음에도 온실가스 배출량은 0.7% 증가했습니다. 동국제강은 배출량을 15.3% 줄였으나 조강 생산 감소에 따른 효과였고, 포스코와 세아베스틸도 집약도 개선 폭이 각각 3.8%, 5.7%에 그쳤습니다. 이는 국제에너지기구(IEA)의 넷제로 시나리오 기준 감축률(7%)에 미치지 못합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여전히 ‘고로 중심’의 생산 체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전기로(EAF)는 고철 재활용을 통한 저탄소 공정으로, 미국은 전체 철강 생산의 70% 이상을 전기로 기반으로 하고 있고, 유럽연합(EU)은 약 44% 수준인 데 비해, 한국은 고로 중심 구조여서 30%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수소 대신 석탄, 전기로 대신 고로
국내 철강 기업들의 2030 온실가스 감축 목표 또한 국제 기준에 크게 못 미칩니다. 4개사 모두 10~12% 감축 목표를 내세웠지만, IEA가 제시한 ‘2019년 대비 24% 감축’이나 글로벌 철강사들의 30% 이상 목표에 크게 뒤진 것입니다. 아르셀로미탈, 티센크루프, 일본제철 등이 30% 이상을 선언하거나 과학기반감축목표(SBTi) 인증을 받은 것과 대조됩니다.
일부 기업은 이미 감축 목표를 달성했음에도 목표를 강화하거나 후속 전략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동국제강은 2018년 대비 배출량이 이미 21% 감소해 2030년 목표를 초과 달성했지만, 추가 감축 목표나 전략 변화는 부재하다는 지적입니다.
철강산업의 탈탄소 전환은 기술적·경제적 도전과 맞물려 있습니다. 핵심은 ‘수소환원제철’입니다. 석탄 대신 수소를 사용해 철광석에서 산소를 제거하는 이 공정은 CO₂ 대신 수분(H₂O)을 배출합니다. 스웨덴 사브(SSAB)는 하이브리트(HYBRIT) 프로젝트를, 독일 티센크루프(Thyssenkrupp)는 이미 수소 제철 실증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한국의 포스코(POSCO) 역시 독자 기술인 하이렉스(HyREX) 실증 플랜트 착공에 들어가는 등 수소 기반 공정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다만 수소 확보 및 청정에너지 도입에 따른 비용 문제는 여전히 해결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또 다른 대안인 전기로 확대도 필수입니다. 전기로는 고철 재활용이 가능한 저탄소 공정이지만, 국내 철강 생산 구조에서 고로 의존도가 높아 전면 전환을 위한 설비 투자와 생산 체계 개편이 필요합니다. 포스코는 1기의 전기로를 신설 중이지만, 충분치 않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총체적 전환 없인 생존 불가능”
국제 규제도 철강 기업의 기후 대응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EU는 2026년부터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시행해 고탄소 철강 제품에 관세를 부과할 예정입니다. 미국도 ‘녹색 철강’ 기준 마련에 나섰습니다. 완성차·건설 등 글로벌 수요기업들도 탈탄소 철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탈탄소 못 하면 시장에서 도태된다”는 경고가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은 세계 6위 철강 생산국입니다. 철강산업은 국가산업발전의 기반이자 수출 효자지만, 온실가스 배출 비중이 큰 고탄소 산업이기도 합니다. POSCO와 현대제철은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을 선언했지만, 수소 공급망 구축, 재생에너지 전환, 고철 재활용량 확대 등 해결 과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이지언 기후넥서스 대표는 “철강사의 온실가스 감축 실적이 부진했던 만큼 탄소중립 전환 이행 체계를 재점검하고 목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온실가스 집약도 목표를 수립해 매년 이행 실적에 대한 체계적 관리가 요구된다”고 말했습니다. 최동진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소장은 “전기로 설비와 저탄소 연원료 투자를 확대하면 저탄소 철강 경쟁력의 단기적으로 확보에 효과적일 것”이라며 “정부가 저탄소 철강의 표준 마련과 공공 의무 구매와 같은 정책적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한편 기후변화행동연구소와 기후넥서스는 시민단체 및 학계와 함께 ‘기업기후행동 시민평가단’을 구성, 주요 기업의 기후행동을 감시할 계획입니다.
‘철의 시대’에서 ‘탄소중립 시대’로의 이행은 단순한 기술 변화가 아닌 산업 구조의 총체적 전환입니다. 전기로 활용 확대, 수소·전력의 재생에너지 기반 확보, 탄소 포집·저장(CCUS) 기술 발달 등 다중적 전략이 유기적으로 맞물려야 합니다. 중공업의 상징인 철강산업에 주어진 도전 과제들은 우리 산업과 국가의 경쟁력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