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창욱 기자] ‘HBM의 아버지’로 불리는 김정호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가 고대역폭메모리(HBM)4 시대에 접어들면서 메모리와 시스템반도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고객사별 맞춤형 설계가 확대되면서 HBM 경쟁도 개별 제품을 넘어 ‘생태계 싸움’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김정호 카이스트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가 15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미국과 중국의 추격 속에서 AI 반도체 패권 사수 전략: HBM의 미래와 더불어’라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사진=박창욱 기자)
김 교수는 15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미국과 중국의 추격 속에서 AI 반도체 패권 사수 전략: HBM의 미래와 더불어’를 주제로 한 강연에서 이같이 밝혔습니다.
김 교수는 “HBM4는 베이스 다이에 그래픽처리장치(GPU)의 일부 기능을 넣기 시작했다”며 “엔비디아와 설계하는 것, AMD와 설계하는 것, 구글과 설계하는 것이 다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고객사가 요구하는 AI 가속기 구조에 맞춰 HBM 설계 단계부터 협업하는 ‘커스텀 HBM’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그는 “과거에는 우리가 만들어 놓고 ‘사세요, 사세요’ 했지만 지금은 처음부터 주문을 받고 설계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이어 “여기서부터는 메모리와 시스템반도체의 경계가 무너진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HBM 경쟁 역시 단순한 성능과 생산량 경쟁에서 생태계 경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게 김 교수의 진단입니다. 그는 “SK하이닉스는 TSMC와 엔비디아가 붙어 있는 것이고, 삼성은 직접 이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라며 “그게 HBM4의 중요한 의미”라고 설명했습니다.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TSMC와 구축한 협력 관계를 기반으로 HBM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면, 삼성전자는 메모리와 파운드리 등을 함께 보유한 사업 구조를 하나의 AI 반도체 생태계로 연결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의미로 풀이됩니다.
김 교수는 이 같은 산업 구조 변화의 배경으로 AI에서 메모리가 차지하는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을 꼽았습니다. 그는 “지금은 AI 컴퓨터의 성능을 누가 좌우하느냐 하면 메모리가 좌우한다”고 강조했습니다. AI 데이터센터가 확대되고 처리해야 할 데이터가 급증하면서 GPU의 연산 성능뿐 아니라 데이터를 얼마나 빠르고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는지가 중요해졌다는 설명입니다.
HBM 이후를 겨냥한 차세대 메모리 기술도 소개했습니다. 김 교수는 발열을 줄이기 위해 베이스 다이를 적층 구조 상단으로 옮기는 ‘톱 HBM(tHBM)’과 HBM끼리 직접 통신하도록 하는 ‘패브릭 HBM(FHBM)’ 등을 연구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CPU나 GPU의 지시에만 의존하던 기존 구조에서 벗어나 메모리 자체가 일부 연산과 데이터 배분 기능을 갖는 ‘메모리 중심 컴퓨팅’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구상입니다.
낸드플래시와 고속 정적 메모리(SRAM)을 활용한 차세대 메모리의 중요성도 강조했습니다. 김 교수는 향후 AI가 기억해야 할 데이터가 크게 늘어나면서 낸드플래시를 적층한 고대역폭플래시(HBF)의 수요가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연구실에서는 SRAM을 적층한 고대역폭SRAM(HBS)도 개발하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중국의 추격은 국내 메모리 산업이 경계해야 할 변수로 꼽았습니다. 특히 애플 등 글로벌 기업이 중국산 메모리를 채택하고 기술 지원에 나설 경우 중국 업체의 성장 속도가 빨라질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중국의 자체 HBM 생산과 국내 반도체 인력 유출 가능성도 위험 요인으로 지목했습니다. 김 교수는 “애플이 중국산 메모리를 쓰기 시작하면 기업의 성장과 매출 기반을 만들어주는 것”이라며 “특히 인력 유출까지 겹치면 3~5년 뒤에는 우리 메모리 경쟁력을 장담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AI 패권 경쟁이 격화하는 상황에서도 한국이 메모리 기술 경쟁력을 바탕으로 주도권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확보한 메모리 기술력이 향후 AI 산업의 경쟁 구도를 좌우할 핵심 자산이라는 설명입니다. 김 교수는 “이제는 총칼로 하는 전쟁이 아니라 경제전쟁, 패권전쟁, 지능전쟁”이라며 “우연히도 우리가 그 코어를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박창욱 기자 pbtkd@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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